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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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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기억들


BY 蓮堂 2005-09-22

9월의 밤은 닭살 돋을 만큼 서늘했다.
그나마 쨍쨍했던 낮 기온의 여운 덕분에 짧은 팔소매가 그리 철 늦어 보이진 않지만 승객 없이 비어있는 플랫 홈 때문인지 한결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여고 동창회 모임이 저녁 시간에 잡혀 있으면 이 기차 아니고는 집에 갈 마땅한 차편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가끔 이용하게 되는데  가파르게 변하는 시대에 밀려 승객들의 발길이 멀어지는 안타까움으로 인해서 매번 느끼는 싸아한 감정은 며칠동안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 큰 역사(驛舍)에 플랫 홈을 드나드는 하루의 승객이 과연 이 역의 종사원들만큼 숫자가 될 런지 궁금한 이유는 한눈에 몽땅 들여놓아도 남아도는 시야에 잡혀온 승객은 나하고 청년하나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기차가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게 영 민망하고 괜히 미안한 맘이 들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이 큰 역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건 내가 기차통학을 하던 여중학교 2학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처음에 이 역사가 시내 권을 훨씬 벗어나서 황량한 들판 한 가운데에 지어졌을 때 모두들 의아해 했다.
무엇보다도 입지 좋은 시내 권을 벗어나서 인적도 드문 외곽지대에 지어 놓았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다녀야 하는 우리 통학생들로서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 되는데 대한 부담으로 은근히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가 옮겨오기도 전에 인근엔 번듯한 상가들이 하나둘 들어서서 그 너르고 황량했던 들판이 어느새 짜임새 있는 새로운 시가지로 변모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역사와의 거리도 압축이 된 듯 자연스러운 볼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유일한 교통수단이 기차 외에는 만만하게 탈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내가 타고 다니는 기차는 석탄 수송용 산업철도인 관계로 길게 이어 붙힌 화차 뒤에는 승객을 위한 객차는 달랑 석 냥 뿐이어서 5일장이 서는 날은 그야말로 서서 가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토요일의 장날은 낮차를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로 복잡했지만 약삭빠르고 눈치 빠른 아이들은 제법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낯 두꺼운 베짱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리 타고 있어도 승객이 넘쳐나서 디디고 설 자리가 남아 있지 않으면 만만한 우리 학생들은 역무원들에게 덜미를 잡힌 채로 쫓겨 내려 와야 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았었다.
요즘 같으면 인권운운하며 감히 상상도 못할 인권유린이었다.
그 와중에도 꾀가 많은 친구들은 화장실이나 의자 밑에 숨어 있다가 용케도 화(?)를 면하기도 했는데 난 꾀도 없고 영악스럽지 못해서 번번이 밤차를 타고 와야 했고 비가 와서 5일장이 흐지부지 하는 날은 운수대통한 날이기도 했던 지난날의 기억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전쟁도 그런 전쟁이 없었지만 그때가  소름이 돋도록 그리워지는 건 살면서 그 시절만큼 아름답고 순수하게 살지 않은데 대한 정서적인 결핍증이 마른버짐 같이 하얗게 번져 나갔기 때문이다.

기차가 들어오자면 아직 10분여의 여유가 있기에 플랫 홈에 나와 있던 역무원에게 말을 걸었다.
"하루에 이용하는 승객이 얼마나 됩니까?"
이런 질문에 익숙해 져 있는지 '그때 그때 달라요.'라는 요즘 유행어를 농담 삼아 비추는 걸 보니 아마 내 물음에 크게 맘 쓰지도 않았거니와 차마 승객의 숫자 드러내기가 민망 했나 보다.
먼저 말 붙혀 놓고 그냥 있기도 어색해서 옛날 얘기를 끄집어냈다,
"30여 년 전만 해도 매일 이 기차 타려면 앉아 간 적이 별로 없었는데........"
독백 겸 방백의 형식을 빌어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나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는 듯 밖으로 틀었던 고개를 안으로 돌렸다.
기차 통학생이었노라고 질문의 명분을 확실하게 밝힌 게 주효 했는지 묻지도 않은 사실들을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요즘 철도청은 적자입니다. 좋은 시절 다 지나가고 우리 역무원도 몇 명 안 됩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환도 곁들이면서 조심스럽게 내 나이가 얼마인지 물어왔다.
30여 년 전에 고등학교 다녔으니까 계산 함 해보시라고  은근히  암시를 주었더니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주머니 부모님 교육열이 굉장하십니다. 이런 시골에서 그때 당시 기차통학 시키며 학교 보낸 부모들 많지 않을 텐데요. 더구나 아들도 아닌 딸을 .........."
뒷 말끝을 흐릿하게 남긴, 마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그 역무원도 아마 그 시절의 어려웠던 경제를 어느 정도 꿰고 있는 듯 새삼 감탄을 했다.
갑자기 아버님이 생각났다.
자식 공부는 도둑질을 해서라도 시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달고 계셨던 아버님이셨다.
설사 당신이 징역을 가더라도 내 자식들 머릿속에 든 지식만큼은 법에서도 뺏어가지 않을 거라는 아버님 나름대로의 자식교육에 대한 열의는 뼈가 저리도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요즘이다.
넉넉치 않은 살림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지방에 있는 중학교 - 당시엔 중학교 입시제도가 있었다. - 를 마다하고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이곳으로 몇 자식을 유학시켜놓고 아버님 나름대로는 자부심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님이지만 기차통학을 하는 여러 자식들 새벽밥을 10년 이상 짓도록 지각 한번 시키지 않으셨다.
이 부분이 지금까지 나를 감동 시키고 콧날 시리게 만드는 부모님에 대한 간절한 맘인 것 같았다.

내가 타고 다니던 기차선로가 궁금해서 5분 남짓 남은 시간이지만 잰 걸음으로 그 레일을 더듬어서 찾아갔다.
반질거렸던 레일은 발갛게 녹이 슨 채로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 침목사이 군데군데 잡초가 삐죽이 올라와 있었다.
구부리고 앉아서 손가락 끝을 레일 위에다가 비벼 보니 붉은 녹이 손끝에 묻어왔다.
이 레일이 이렇게 발갛게 녹이 슬 거라는 거 상상도 못했던 서른 해 전이었다.
시대에 떼밀려간 그 좋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수 십 년도 더 지난 이 자리에서 여전히 난 단발머리 하얀 칼라의 여고생의 모습으로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두 평행선이 맞닿은 끝은 어둠 속으로 잠식당하고 금방이라도 울릴 것 같은 기차의 울음  소리는 목이 메 인 듯 쉬이 터져 나오질 않았다.
이 길로, 이 레일위로 6년이나 오가면서 장래에 대한 꿈도 숱하게 키웠었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을지에 대한 핑크빛 기대도 달리는 기차만큼이나 속도를 내면서 빠르게 앞서기도 했었는데 지금의 내가 과연 그때 내가 그리던 그 모습으로 흠집 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지 아직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리기가 망설여졌다.

두 팔을 벌리고 평행봉 위에서 체조 시험을 치루는 자세로 레일 위를 걸어 보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백 미터는 족히 걸었는데 건들거리는 몸뚱아리 때문에 몇 발자국 못 가서 바닥으로 내려서야 했다.
피식거리는 나 혼자의 헛웃음이 한밤의 정적을 깨는 기차의 외마디 소리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두 명의 승객을 태우기 위해서 기차는 눈알 번들거리며 숨 가쁘게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