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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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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구엄마처럼


BY hayoon1021 2005-08-23

 

주말은 괴롭다. 애들이 어린이집에 안 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애들과 함께 있으면 피곤하다. 특별히 애들한테 신경써주는 것도 아니면서 평일의 배 이상은 힘이 든다. 일곱 살, 다섯 살, 두 놈은 갈수록 다스리기가 어려워진다. 겁주는 걸로 끝날  때가 많지만, 하루에 두 번은 꼭 매를 들어야 한다. 사랑의 매는 감정이 실리면 안 된다지만, 나는 감정을 팍팍 실어 매를 든다.

지난 일요일 아침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만사가 다 귀찮았다. 작은놈 아침밥 챙겨 먹이고 나니 더는 기운을 쓸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리모컨을 찾아 쥔 나는 이불 위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근데 이놈들이 웬 떡인가 하며 냉큼 들러붙었다. 바쁘게 집안일 하고 있으면 저희들끼리 잘 놀다가도, 엄마가 한가롭다 싶으면 그냥 내버려두질 않는다. 보통 때는 대충 시달려 주는데, 그날은 냉정하게 뿌리쳐 버렸다.

그랬더니 큰놈이 만화를 보겠다고 심통을 부렸다. 나는 마침 텔레비전 영화에 빨려들던 참이라 다 볼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 놈이 번갈아 가며 심술을 피우고 귀찮게 했다. 무려 한 시간 이상을. 나는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결국 리모컨을 넘겨받은 큰놈은 정작 반응이 시큰둥했다. 애초에 만화가 목적이 아니었던 거다. 작은놈은 동화 CD를 듣다가 제가 좋아하는 장면을 놓쳤다고 징징대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들으라고 돌려줬는데도 막무가내다. 이놈 역시 엄마한테 엉겨 붙을 목적뿐이었던 거다. 두 번 세 번 달래도 그치지 않았다.

결국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매를 들었다. 엉덩이를 몇 번 때리며 겁을 줘도 작은놈은 계속 악을 썼다. 제발 뚝 하라고, 일단 그 울음부터 멈추고 얘기하자고, 아무리 말해도 아이는 듣지 않았다. 나는 결국 가려가며 때리던 매를 마구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엄마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나도 피곤하고 힘들어 죽겠다. 다시 듣게 해 줬으면 됐지 더 이상 뭘 어쩌라고? 엄마더러 뭘 어쩌라는 말이니?”

이미 아이가 알아듣기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발악이다. 내 입에서 나오는 쇳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끔찍했다. 그제야 작은놈은 겁을 먹고 구석으로 숨었다. 퉁퉁 부어 있던 큰놈도 슬금슬금 제 방으로 가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꼴이 얄미워 큰놈도 불러다 앉혔다.

“너 말 좀 해 봐. 엄마는 영화 좀 보면 안 되니? 왜 엄마가 영화 보는 동안 그렇게 방해하고 심술 부렸니? 엄마도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냥 좀 누워 있으면 안 돼? 너 심심한 걸 갖고 왜 엄마한테 야단이야, 응?”

톤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내 목소리는 이제 곧 통곡으로 변할 태세였다. 큰놈은 작은놈처럼 도망도 안 가고 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창으로 가득 들어와 마치 불을 밝힌 것처럼 환해졌다. 하지만 방안 풍경은 너무나 살벌했다. 이제 그만 하라는 신호가 내 머리에서 계속 울려나왔다. 작은놈처럼 도망이라도 가면 될 텐데, 벌벌 떨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큰놈이 부담스러웠다. 뭐든 엄마한테 할 말 있으면 해 보라고, 나는 큰애한테 선심 쓰듯 말했다.

큰놈은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나는 큰놈이 언젠가는 그 달싹거리기만 하던 입술을 움직여,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내심 다지고 있다. 다행히 아직은 아무 대꾸 안 하는 것에 안도하면서 그만 나가라고 하였다.

기가 팍 죽어버린 애들이 슬그머니 방에서 나갔다. 나는 혼자 방에 남았다.  햇살이 자꾸만 내 얼굴을 핥았다. 그 빛이 부끄러웠다. 나는 아이들 야단치고 난 다음이 제일 끔직하다. 내 얼굴에 침 뱉어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내가 많이 잘못했다. 애들 잘못만 지적하는 데서 끝냈어야 하는데, 난 아이들한테 화풀이를 한 거였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대한 분풀이를 애들한테 한 거였다. 그것도 모자라 며칠 전 남편과 싸우고 난 앙금까지 다 애들한테 퍼부은 거였다. 내 치사함에 내가 치를 떨었다.

나는 평소에는 조용한 편이다가 한 번 화가 나면 딴 사람이 된다. 모든 걸 끝장내 버릴 듯이 행동한다. 특히 남편과 싸울 때는 남편이 도중에 항복해도, 내 분이 다 풀리고 내가 지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연애할 때부터 남편이 가장 질려하는 부분이다. 많이 고쳐졌다고는 하나 불쑥불쑥 그런 성질이 나온다. 그럴 때는 내가 너무 싫었다.

화를 안 내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일에나 적당한 선이 있는 것이다. 난 번번이 그 선을 넘어, 해서는 안 될 말을 많이 한다. 때려 부수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사실 말이야 말로 형체는 없으면서 가장 치명적인 폭력이다. 아버지한테 숱한 언어폭력을 당해, 누구보다 그 피해의 실상을 잘 아는 내가, 똑같이 하고 있다 생각하면 정말 한심하다.

EBS 프로그램 중에 \'꼬마펭귄 핑구\'라는 게 있다.

펭귄가족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며칠 전에는 나도 애들과 같이 봤다. 그날 제목은 \'팬케이크 만들기\'였다. 핑구엄마가 팬케이크를 만들려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다. 핑구형제가 들어와 자기들도 해 보겠다고 한다. 난 속으로 당연히 안 되지 했다. 하지만 핑구엄마, 기꺼이 반죽하던 그릇을 애들한테 내 준다.

핑구엄마가 프라이팬을 달구는 동안 핑구동생이 이상한 걸 집어넣어 반죽이 풍선처럼 부풀어 난리가 났다. 한데 핑구엄마는 화내지 않고 그걸 수습해 팬에 붓는다. 엄마가 케이크를 능숙하게 뒤집는 모양을 본 핑구는 그걸 따라하려고 한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위험하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핑구엄마는 두말없이 팬을 내 준다.

그런데 내용물을 휙 날려서 그걸 팬에 안착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시도한 케이크는 천장에 착 달라붙어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화낼 줄 알았던 핑구엄마, 반죽을 팬에 부어서 적당히 익힌 다음 뒤집을 때가 되자 다시 팬을 핑구한테 건네준다. 이번에는 벽에 있는 시계에 갖다 붙는다. 금방 집안 여기저기 케이크가 쌓인다. 그래도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멋지게 뒤집는 것에만 쏠려 있다.

큰놈이 슬쩍 나를 보더니 ‘정말 핑구는 말썽꾸러기죠?’ 하며 제 일처럼 걱정한다. 큰놈의 그런 소심함도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습은 핑구아빠가 올 때까지 계속된다. 핑구아빠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케이크가 휙 날아가 아빠 얼굴에 착 달라붙는다. 이젠 아빠까지 가세해 핑구를 응원한다. 드디어 성공한 핑구한테 온 가족이 박수를 쳐 준다. 이제 자유자재로 팬을 다루게 된 핑구는 가족들 접시 하나하나에 솜씨 좋게 휙휙 케이크를 던져 준다.

정말 대단한 핑구엄마였다. 만화니까 그럴 수 있겠지 하기엔 와 닿는 게 참 많았다. 실제 저런 자세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다.

핑구네 가족은 펭귄이기 때문에 우리말 대사가 없다. 펭귄 소리만 있다. 불어를 음성 변조한 것 같은 그 웅얼거림은 좀 정신없고 시끄럽긴 하지만, 그림과 함께 보면 다 이해가 된다. 그건 펭귄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언어다. 화내고 기뻐하고 격려하고 떼쓰는 등의 모든 감정이 다 들어 있다.

그 핑구네 말이 너무 매력 있어서 나도 그 말을 쓰고 싶어졌다. 화가 나면   핑구네 말로 화를 내면 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도 상대방이 알아듣지를 못 하니 상처 줄 염려도 없다. 사실 내가 흥분하는 것은 나 지금 화났어, 그걸 알아줘, 하는 뜻이지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거나 뭔가 큰 변화를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다.

사는 동안 화를 안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걸 풀어야 한다면, 그때마다 핑구네 말로 떠들면 좋을 것 같다. 국제결혼한 부부가 싸울 때는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자국말로 욕을 막 한다는데, 그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펑펑 우는 것처럼,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도 분명 스트레스를 푸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소중한 내 가족이라는 점이다. 가족을 보호하면서 화도 풀 수 있는 방법은 핑구네 말이 최선으로 보인다.

한데 핑구네 말을 따라 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핑구엄마 흉내라도 내야 할 텐데, 그건 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