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시장통은 시멘트 색이 탁한 회색이었다. 시장 바닥도 동시상영을 하는 극장도 단층건물도 내가 살고 있던 주거지도 고단이 섞인 가난한색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그 집은, 처음으로 엄마랑 같이 살게된 왕십리 그 집은 이층집이었다. 이층엔 주인이 살고 일층은 셋방살이 네집이 마주보고 있었다. 사람 둘 정도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방한칸씩 네 집이 마주보며 다정하게 살았다. 대문 가까이 놓여 있던 한 집만이 부엌이 따로 달려 있고, 나머지 세 집은 공동수도를 쓰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똥~~퍼어~~”하던 푸세식 화장실은 네 집이 쓰는 그래서 아침이면 화장실 기다림이 이어졌는데, 그 기다림을 참지 못하면 공동부엌겸, 공동빨래터겸, 공동세면대에서 몰래 볼일을 보곤 했었다. 누구나 그랬기 때문에 실례하는 장면을 보고도 못본척 당연한척 했었다. 우리집은 방문과 수돗가가 바로 앞에 있어서 밤중이고 새벽이고 실례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었다. 동시에 울려주는 가죽피리까지 이중창이 되는, 꿈속에서까지 시원하게 실례를 하는 달콤함 새벽잠에 빠지곤 했었다.
네 집 다, 다였는지 아니였는지 그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대부분 생계를 유지하던 곳은 왕십리 중앙시장 안에 있었다. 대문 제일 가까이 있던 부엌이 따로 달린 집, 셋방살이 네집에서 제일 부유한 그 집 부부는 건어물 장사를 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하게 장사를 해서 돈을 잘 번다고 했다. 젊은 부부였는데, 어느 여름날 밤에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건어물 부부 싸움은 온 집안 식구들을 뛰쳐 나오게 했다. 건어물 아저씨가 건어물 아줌마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며 부엌으로 나오더니 물 받아 놓고 쓰는 뻐얼건 고무다라이 통에 아줌마를 쑤셔 넣었다. 뻘건 물통에 머리통을 집어 넣었다가 다시 빼고 다시 집어 놓고, 죽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건어물 아줌마는 정신을 잃고 부엌바닥에 빨다만 빨래처럼 너부러져 있을때 경찰이 왔고, 밤낮없이 장사를 하던 건어물 아줌마는 며칠동안 방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 뒤부터 나는 건어물 아저씨가 살인자라고 인정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한동안은 실례하는 소리에 깨어 달콤한 새벽잠에 빠지지 못하고 무서움증에 시달리곤 했었다.
우리집 맞은편 방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아들은 없고 다 큰 딸이 하나 있는데, 이년의 딸년이 속을 엄청 썪이고 있다는 걸 어린 내가 봐도 알 수가 있을 정도였다. 노부부는 노점에서 야채장사를 하는데, 야채처럼 새파란 젊은 딸년은 남자와 놀아나고 있었다. 노부부가 낮에 장사를 나가면 딸년은 남자를 데리고 와서 한 냄비씩 밥을 비며 먹고는 설거지도 안하고, 그 남자와 나갔다가 안들어 오는 것 같았다. 늙은아줌마는 문지방에 멀건 눈동자로 앉아 있다가 대문 열리는 소리만 나면 깜짝 놀란 눈으로 문쪽을 바라보곤 하셨다. 그 날도 늙은 부모는 시장으로 나가고 딸년은 집에 있었나보다 내가 학교 갔다가 들어오니 수돗가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거시기를 씻고 있었나보다 나를 보더니 얼른 빤스를 올리고 세수대야의 물을 획 버리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방안에 남자가 누워 있는게 보였다. 난 속으로 화냥년 그랬다. 화냥년이란 말을 어찌 알았을까? 아마 어른들이 화냥년이라고 욕을 하는 걸 내가 들었을 것이다.
건어물 부부 맞은편 방엔 팔자편한 여자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와 살고 있었다. 남편은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여자는 집에서 살림만하는 팔자편한 아줌마였다. 근데 그 딸이 또 문제가 있었다. 울었다하면 온 집이 울려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여섯살치고 외소하고 말랐었는데 그 성깔은 아카시아나무 가시처럼 왕성하고 날카로웠다. 팔자편한 아줌마는 여섯 살짜리 딸아이한테 꼼짝을 하지 못했다. 하루종일 안고 어르고 달래고 방바닥에 아이를 내려 놓지도 못하고 살았다. 한번 기분이 나빴다하면 온 집안이 난리가 난다고 자꾸자꾸 아이의 비위를 맞추느라 벌벌 떨었다. 그래도 그 딸이 예쁜지 날 보면 우리 딸 예쁘지? 하고 말을 걸곤 하셨다.
우리가 사는방은 공동수돗가와 제일 밀첩했다. 방한칸에 여섯명이 살았다. 넷째이모, 막내이모, 이종사촌오빠, 엄마, 큰동생, 나. 그러니까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이종사촌 오빠방에 이모들과 우리가 더부살이를 한거였다. 잠시만 머무르기로 한 간이역이었다. 일직선으로 머리를 두고 자려면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방 한가운데로 발을 모으고 동그랗게 잤다. 해바라기 꽃같았다. 우리방은 밤마다 해바라기 꽃이 피어났었다. 이때 나팔바지가 유행하던 때, 내 나이가 12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막내 이모가 친구들이랑 장충당공원으로 사진을 찍으러 간다기에 나도 따라 간다고 했더니 옷이 더럽다고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고집을 부려 막내이모 앨범에 나팔바지 입은 내 고집이 흑백사진으로 박혀져 있었다. 진노랑색 나팔바지가 땅색이었는데 흑백사진이라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건어물 아저씨는 살인미수를 저질렀는데도 감옥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헤어지지도 않고 몇달 뒤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간 뒤 헤어졌는지 어쨌는지 알 수는 없다지만 부부싸움 칼로 물베기라 했다. 내가 알기엔 부부싸움이란 것은 물통에 쑤셔 넣었다가 뺀 빨래였지만...
노부부의 딸년은 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 남자였는지는 다른 남자랑 살림을 차렸는지 모르겠지만 노부부는 딸의 동거를 인정하고 사위가 오면 음식 지지는 냄새가 좁은 통로로 그득했다. 팔자편한 아줌마 딸은 결론이 어찌 됐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커갈수록 가시같은 성깔이 무뎌졌을거라 생각한다.
밤마다 해바라기꽃이 피던 우리는, 이모는 이모들끼리 우리식구는 우리식구끼리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다리를 쭉 늘리고 머리를 일직선으로 잘 수 있는 이층 다다미방으로 이사를 했을 때가 13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