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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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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아빠와 패랭이꽃


BY 개망초꽃 2005-06-16

애들아빠는 그동안 일하느라 수고했다고 여행을 가자고 했다. 딸이도 없고 아들아이와 

셋이 간다는 것이 불편하고 즐겁지 않아서 원주친구네나 가고 싶다고 말했다.


원주는 내 고향쪽이기도 했지만 친구남편과 얘들아빠는 같은 일을 했던 동료였기 때문

에 식구들과 다 같이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친구와

난 원래 친구가 아니였고 남편들끼리 동료라서 같이 만나다보니 여자끼리 친해져서

남자들 끼리도 더 친해지게 되었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애들아빠랑 헤어질때쯤

친구부부도 남편의 바람으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친구는 아이들만 데리고 고향인

원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자들은 여자들 끼리 남자들 흉을 보면서 더 돈독한

친구의 자리를 잡아가고,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술잔을 기울리며 홀아비끼리 신세

한탄을 했을것이다. 일이 잘 되려고 그러는지 못되려고 그러는지는 아직 미완성이

지만 친구가 허리디스크로 수술을 하게 되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

었다. 그래서 난 병문안을 가려고 했고, 얘들아빠는 친구남편이 간호한다고 병원에

있다니까 그 핑계를 잡아 서란이엄마 병원에 입원했으니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차 갔고 가니까 준비하고 나와 했다. 그렇게 넷이 몇 년만에 눈물 겹지도

않은 만남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서란이 엄마가 퇴원하면 원주에 놀러 와 그러니까

남자들끼리 같이 가자, 같이 만나자고 하면서 날을 잡고 있었다. 그러면서 옛날에 애들

어릴 때 같이 놀러 다닐때가 좋았느니 잘했다느니 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자꾸들 한다.

여자들은 옆에서 눈짓을 해가며 혀를 차면서 진작에 잘 할 것이지 했다.


매장을 정리한 그 일요일날 원주로 우린 향했다. 난 항상 그랬지만 뒷자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얘들아빠는 헬끔헬끔 날 쳐다보고, 난 못본척 6월초의 푸른 감상에

젖어 있었다.


친구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도착하자마자 손을 흔들고

반긴다. 친구남편도 주차장에서 같이 반긴다.

친구 큰딸이나 우리 큰딸은 없어서 빠졌고 아들 하나씩 끼고 오리숯불구이집으로 갔다.

“직원들이랑 무의도에 많이 갔었는데.”

뭔말끝에 얘들아빠는 이런 속도 없는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열이 나는 걸 참았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또 그런다

“저번에 제주도에 랜트카 빌려서 놀러갔다 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하면서 얘들 키우느라 여행다운 여행 한번도 못가봤는데. 누군 참 팔자좋은

사람이네. 이젠 내가 팔자 편하게 놀러 다닐테니 생활비를 줘.”

애들아빠는 하던말을 멈추고 고기를 씹고 있었다.

친구는 고기를 뒤집으며 내 말을 받았다.

“ 상아엄마 일 그만해. 집 샀으니까 그만 해도 돼. 원주 자주 놀러와.”

“ 이제 일 안할거야. 제주도 놀러 다닐 정도로 형편이 나아졌는데 뭐하려고 고생을 해.

나 이제 어디서도 이력서 안 받아줄 나이더라구. 몸이 약해서 식당에서도 그 몸으로

며칠이나 나오겠어요? 하더라니까.”

거짓말을 쳤다. 식당일 하려고 면접 본적도 없지만 보나마나 식당에서 날 써 줄리가

없다는 건 맞는 말이긴하다.


 

일산신도시로 분양을 받아 처음을 내 집을 장만했던 아파트에서 이웃친구들을 두명 사겼

었다. 큰 아이들이 또래였고, 사는 평수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해서 부부들끼리도

집집으로 다니며 저녁도 먹고 술도 한잔씩 하기도 했었다. 그때도 남편은 속도 없는 말을

화투장을 내듯 툭툭 던졌다.

“밤새 고스돕을 쳤는데 이십만원 잃었어요.”

“어제 술을 먹었는데, 와~~육십만원이 나왔어요.”

그때 남편이 내게 갔다주던 한달 월급이 백만원이었다.

집으로 와서 참 많이도 싸웠다. 월급이 얼만데, 술값이 얼마라고? 하면서...

결국은 사채빚으로 집을 다 날리고 지금도 신용불량자를 못 면하고 있다.


커피를 뽑아 들고 오리식당집 뒤뜰로 갔다. 뜰엔 진한 빨간색꽃이 여름 태양을 닮아 활활

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패랭인데 야생패랭이가 아니고 원예종패랭이라서 꽃색도

진하고 꽃도 다닥다닥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고향 냇가에 피어 한들거리던 패랭이꽃은

아니였지만 커피를 마시며 패랭이 꽃을 보며 기분을 풀기로 했다.

원래 그랬던 사람이었으니까. 원래 속이 없고 돈을 물 쓰듯 마구 퍼서 쓰던 사람이었느니까.


어릴적에 고향 냇가 언저리엔 패랭이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냇가에서 놀다가 팬티

바람으로 패랭이꽃을 보러 갔다오곤 했다. 허리만큼의 키를 갖고 있던 패랭이꽃을

손으로 가르며 걷던 유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 한편에 꽃색처럼 남아 있다.

패랭이꽃을 몇송이 꺾어와 모래에 꽂아  놓고 모래 장난을 하던 눈부신 여름날. 하얀

백사장과 짙은 분홍색의 눈부심이 오래도록 기억속에 꽂혀 있었다. 얘들아빠와 헤어질

준비중이었던 어느 해 여름 아이들과 고향 냇가를 찾았었다. 뚝방길을 걸으며 딸아이는

꽃을 찾고, 아들아이는 송장메뚜기를 잡으려고 쫒아 다닐때 애처로운 한송이 패랭이꽃

을 발견했다.

“엄마 어렸을 때 저기 냇가 가장자리에 이 꽃이 밭을 이뤘었어. 장관이었지. 엄마가

성인이 된 뒤에 패랭이꽃이 보고 싶어 이 자리에 왔더니 없었어. 슬프더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생활고와 생활고 사이에만 슬픔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슬픔도 있구나 했지.

패랭이꽃을 손으로 밀치며 건던 그 길을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허무로움이

밀려들었어. 그 기분이야 지금 엄마는..."

딸아이는 아무말도 안하고 저 건너 패랭이꽃밭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고, 아들아이는

송장메뚜기를 잡았다고 우리를 향해 뛰어 오고 있었다.

 

오리식당집 뜰에 활활 타오르던 원예종 패랭이를 보며 난 또 어릴적 패랭이 밭 이야기를

했다.

" 원예종 패랭이는 색이 화려하고 꽃이 다닥다닥해서 실증난다. 야생패랭이꽃이

보고 싶다."
" 그럼 당신 고향에 갈까? 여기서 30분이면 가는데..."

내 기분 맞추려고 애들아빠가 서둘러 차에 올랐다.

그래서 고향으로 달려갔다. 패랭이꽃은 날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좀 일러서 그런지

애기똥풀꽃만 낯익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낚시를 드리운 낯선 여행객만이 한가로이

물가에 앉아 있었다.

 

밤 느즈막히 원주를 떠났다. 친구남편도 식구들을 두고 서울로 향하며 친구에게 멋대가

리 없게 하던말이 생각나 혼자 슬그머니 웃었다.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어. 내가 매일 전화해 볼거야."

친구는 남편 뒷통수에 대고 그랬다.
" 그런말 하려면 원주 내려 오지 마." 

 

애들 아빠는 돌아오는 차속에서 처음으로 맘에 드는 말을 했다.

"마음 편하게 쉬어. 생활비 줄테니까.알았지?"

"나 이제 팔자 편하게 생겼네."

"화원에서 패랭이꽃 사줄까?"

"원예종은 싫어. 냇가에 피어 있는 패랭이꽃이 예뻐. 시골살면서 길가에 패랭이꽃을

좍~~심고 싶다."

"시골에서 혼자살면 남자가 업어가서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