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장사를 접고 처음으로 비오는 아침을 내려다 봤다. 시간 맞춰 어디를 가지 않고, 시간에 쫒겨 출근은 하지 않는 비오는 아침은, 방학을 맞이한 여학생이고 휴가를 얻은 처녀인 것이다.
작은 아이를 보내 놓고 베란다에 무릎을 올리고 앉아 한참동안 창 밖을 보았다. 일없이 놀면서 아무 생각을 안하기로 했다. 앞으로 뭘 할지 뭘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뭘 저축해서 노후를 마련하고 ...뭐 이런 ...일상의 당연한 고민들을 잠시만이라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런다고 해서 너무 고민을 안하면 나태해지고 무력감에 싸일까봐 순간의 광경을 확실하게 보고 감상을 철저히 한다.
12층 높이에서 바라다보는 광경은 산에서 바라다 보는 그 풍경 맛이다. 사실 산에서 내려다보는 거와 전혀 다르겠지만 난 그 기분이 되기로 한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2차선 도로는 냇물이고 가로수는 뚝방길 나무가 된다. 고딕체 주택들은 전원주택이고, 뜨락은 들꽃이 흐드러진 언덕이다.
몇 년전에 그때는 전업주부였었다. 그 때 읽었던 책 내용이 생각난다. 병원 중환자실에 환자 두 명이 있었다. 한 환자 침대는 창밖이 보이는 창가자리였고, 다른 환자 자리는 창밖이 보이지 않는 문가자리였다. 창가에 앉은 환자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문가자리 환자에게 창밖 풍경을 매일매일 얘기해 주었다. 나뭇잎이 푸르러요.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모래사장이 햇살에 부딪혀 은빛이네요. 저녁놀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 같아요. 문가자리 환자는 창가에 앉은 환자가 정말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창가자리 환자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고통속에 가슴을 움켜잡았다. 문가자리 환자는 머리맡에 있는 비상벨을 누루려다가 말았다. 창가자리 환자가 죽으면 내가 그 자리로 옮기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음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고 내 병도 금방 나을지도 모르지하면서 비상벨을 누루지 않았다. 창가자리 환자는 심장마비로 저세상 사람이 되었고, 문가자리 환자는 창가자리로 옮겼다. 근데, 창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시멘트 바닥과 바람먼지만 일으키는 허허벌판이었다. 창가자리 환자가 얘기해 준 건 상상속의 풍경이었던 것이었음을 알았을 땐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한가지 생각속에 나를 주입하고 스스로 나를 틀안에 살게 한적이 많았다. 나의 단점이 뭐냐고 물으면, 한가지 일에 상처 받고 한가지 생각에 모레성을 쌓고 있는게 나의 나쁜점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가지 생각을 가지고 밥도 먹지 못했고 잠도 편히 자질 못했다. 그래서 가게를 두고 닫아야하나 열어야하나를 가지고 밥을 먹지 못했고 잠을 깊게 자질 못해서 머리가 팅팅 불어 있었다.
비오는 풍경은 언제나 과거로 나를 돌아가게 하고, 마음을 거리의 떠돌이로 만든다. 당분간은 밥을 잘 먹기로 했다. 그러려면 미리 걱정부터 하면 안된다. 나는 나를 “ 되는대로 살자”로 만들기로 했다. 비오는 창가에 나를 두고 “빈둥빈둥 즐기기”로 했다. 이리 되고보니 나처럼 편하고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이 일산신도시에 나뿐인것 같으다.
본인인 나는 진작 이리 되어 살기로 했는데, 주변에서들 걱정이 먼저 앞서서 난리다.
다른 장사할거야? 장사는 이제 안해요. 그럼 글 쓸거야? 글쟁이는 돈이 안되잖아. 그거 공부한다며...뭐드라? 아...숲해설가...그건 돈도 들고 돈벌이가 될 것 같지 않아서 생각중. 그래 여름은 더우니까 여름동안은 쉬라구. 네..그럴생각이에요. 말은 이렇게 담담하게 털어 놓고서 하루에 몇 번씩은 한숨이 나온다. 작은 아이가 아직 어린데, 큰아이도 이제 대학 일학년.생각을 말자. 한숨이 절로 나올테니...
작은 아이가 비오는 줄도 모르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우산을 찾는다. 신발장이 좁아서 우산을 베란다 창고에 넣어 두었지. 베란다고 가서 밤색체크무늬 우산을 갖다 주었다.“잊어버리지 말아라.” “ 아이..옛날의 내가 아니에요. 이제 안 잊어버려요.” 맞다. 요즘은 잘 안 잊어버리지. 작은 아인 신발주머니를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근데 이해할 수 없는 건, 한짝 신발이나 한짝 실내화를 잊어버리고 신발 주머니엔 한짝만 들어있는 경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겉옷을 너무 잘 잊어버려서 겉옷을 입혀주면서 더워도 참고 벗지 말아라 언포를 넣을 때도 많았다. 근데 요즘은 잊어버리는 걸 잊어버려서 하핫~~ 창고에 우산이 세 개나 포개져 있었다.
오후에 비는 그쳐 있었다. 아이를 보내고 비오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오전잠을 잤다. 언젠가 아침형 인간이라는 말이 유행을 할 때 난 완전 게으름뱅이로 찍히게 되었다. 난 밤형인간이기 때문이다. 밤엔 눈이 반짝거리는데 아침엔 눈빛이 흐리다 못해 맛간 생선 눈동자가 된다. 작은 아이 학교갈 시간에 겨우 일어나 눈을 감고 아침을 차려주고 다시 침대로 들어간다. 학교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멀리감치 들리고 현관문 잠그는 소리가 남의집 문 잠그는 소리같다. 작은 아이는 항상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닌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일을 했기 때문에 내가 있어도 문을 잠근다. 내가 있어도 벨을 누루지 않고 열쇠를 꺼내는 소리가 난다. 버릇은 좋은거면서도 고치기 힘든 성격으로 자리잡게 된다.
작은아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쪽 손에 우산을 들고 나를 보고 웃는다. 비가 그쳤지? 네.그래두 우산 잘 챙겼어요. 우산을 번쩍 들었다가 신발장위에 얹어 놓는다. 자식, 오학년 때까지도 잊어버리기 이등하면 서러울 정도드니 6학년이 되니 철이 들고 있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무슨 아이가 자기 주장이 없다. 니가 먹고 싶은 거 큰소리로 말해 봐? 아무거나 좋아요. 큰소리로 말한다. 빵, 떡 어느 거? 나도 큰소리로 물었다. 빵이요~~
우리 나무그늘 밑을 걷자. 비가 온 후엔 나뭇잎 색이 선명해 져. 빗물을 머금어서 그럴거야. 아니다 먼지가 씻겨서 그런걸거야. 나무가 머리를 감았다. 풀은 손을 씻었잖아. 거리는 수세미로 북북 딱았고...비온뒤라 우리 마을이 깔끔할거야. 설거지를 한 것처럼.
도시 아파트 단지엔 벚나무가 제일 흔하다. 봄엔 꽃이 풍성해서 좋고, 여름엔 햇볕을 확실히 가려주고, 단풍이 들면 그런대로 곱다. 벚나무엔 버찌가 마구 익어가고 있었다. 손에 닿는 곳엔 벌써 사람손을 탔다. 내가 까치발을 들어 나뭇가지를 잡아 댕기고 작은 아이가 버찌를 땄다. 꽃을 따듯 열매 줄기를 차곡차곡 해서 손에 쥐었다. 더 따고 싶은 욕심에 나뭇가지를 강하게 잡아 당겼더니 가지 뿌러지는 소리가 났다. 난 나무에게 못쓸짓을 한 것 같아서 그만 따자고 했다. 먹으려고 딴 게 아니고 추억거리로 딴거니까. 고향산엔 산벚나무가 여름이면 까만 열매를 달고 하늘향해 가지를 벌리고 있었다.산벚나무는 다리가 길어 나무로 기어 올라가야만 열매를 딸 수가 있었다. 난 나무를 오르지 못하고 동네 오빠들이 나무에 올라 버찌를 한웅큼씩 땄다. 버찌의 맛은 약처럼 썼다. 그래서 도시로 왔을 때 손에 닿게 가지를 뻗고 있는 버찌가 산벚나무 열매보다 크고 실했어도 따 먹을 생각을 안했다. 작은아이와 같이 딴 버찌도 크고 쌔까맣다. 버찌물은 진해서 옷에 닿으면 지워지질 않는다. 어릴적에 쓴 버찌맛을 조금 본 것 뿐인데 하얀 티에 버찌물이 들어서 엄마한테 야단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옷에 묻으면 지워지지 않으니까 조심해라.”
아이는 손바닥을 벌려 내게 보여 주었다. 손바닥엔 버찌물이 미술시간에 열심히 그림을 그린 학생같았다.
앵두나무 이파리 사이에도 앵두가 달려 있었다. 앵두는 물기를 먹어 담가논 쌀처럼 불어 있었다. 앵두도 한웅큼 땄다. 고향집 뒤뜰엔 어느집이나 앵두나무 두어 그루씩 있었다. 얼마나 다복한지 가지마다 큰 구슬을 욕심껏 꽨 목걸이 같았다. 따먹고 또 따먹어도 앵두는 목거리로 남아서 소낙비가 오면 목거리 끈이 끊어져서 빨간구슬이 땅바닥에 나뒹굴어지는 걸 뒷문을 열고 한없이 바라다 보곤 했었다. 나도 같이 작은아이와 앵두를 따면서 지나가는 사람 눈치를 봤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괜히 큰소리로 떠들었다.
“엄마 고향엔 앵두나무가 무지 많았다. 얌마~조금만 따자.”
“엄마~~껌껌해서 잘 보이지 않아요. 내일 낮에 우리 많이 따요.”
저것이 저것이 눈치는 없어가지고...
둘이 뭔 대단한 거 수확한 것처럼 버찌와 앵두를 양손에 들고 벌어진 입을 해가지고 집으로 와서는 흐르는 수돗물에 닦았다. 며칠전에 소독약을 소나기처럼 뿌리는 걸 봐서 먹기가 좀 껄끌러웠지만 벙글어진 아이 얼굴을 봐서 먹지 말라는 말을 못했다. 버찌는 생각보다 덜쓰면서 달았고. 앵두는 새코롬하니 달았다.
다음날 작은아인 앵두를 한손 가득 따와서는 엄마 사람 안 볼 때 따왔어요. 제가 씻을게요 한다. 너도 어른이 돼서 버찌와 앵두를 보면 엄마처럼 같은 추억을 더듬거리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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