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얘들 아빠는 집을 샀다니까 좋아하기보다는 미안해 했다.
그러더니 살림 자기가 다 팔아먹었으니까 필요한 거 사준다고 했다.
허이구,알긴 아네.
당연히 받을만해서 이마트로 데리고 갔다.
맨 먼저 가스렌지를 샀다. 보통 이십만원정도 줘야하는데 싼 편에 속하는 걸로 때 안 끼는,
아니다 때가 잘 안보이는 검정색으로 샀다.
진동청소기도 샀다. 디자인이 날렵하고 기능이 복잡한 건 비싸지만 간단하고 단순한 건
훨씬 저렴해서 파란 딱정벌레닮은 청소기를 선택했다.
쇼파도 샀다. 이왕 받을 거 확실하게 받았다.
동그란 유리가 깔린 하얀색 미니 식탁도 쇼파와 함께 배달해 달라고 했다.
집에 잠깐 들어왔다가 가라니까 싫다고 한다.
난 인사치레로 한편으론 불쌍해서 하는말이었는데 싫다니...옳게 생각했네.
집에 오면 가기가 힘들 것 같아서 안들어 왔다고 문자가 왔다.
하긴 그럴거다. 지난날들이 얼마나 단란하고 귀한 날들이었다는 것을,
되돌아 가기긴 너무 멀리 떠나 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다니...
둘.
처음 집을 살 때 29인치 새까만 아남 텔레비전이 유행이었다.
이것이 세월을 먹어 늙어버렸고 둔탁해져서 새로 이사한 집으로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그걸 알고 막내동생이 젊디 젊은 은빛날개가 달린 텔레비전을 보내왔다.
리모콘을 누루면 띠리링~~하는 맑을 소리를 내면서 화면이 커텐처럼 펼쳐진다.
난 젊은이에 반해 빠져 버리고 말았다.
잘 보지 않던 연속극에 취해서는 불량주부를 마구 웃으며 보고
별사탕과 건빵인지...이것에 흠뻑 젖어 눈물을 흘리고 난리였다.
조 조 조런 어린 남자가 날 사랑한다면 난 우짤까나? 저짤까나? 하면서...크흐~~~
셋.
나이는 오십이요 마음은 소녀인 이모가 있다.
아직도 레이스 달린 집시풍 치마를 입고,이모와 똑같은 레이스 달린 원피스 입힌
개한마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꽃가꾸기 취미인 막내이모.
소녀 이모가 쇼파와 식탁에 어울리는 레이스 달린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방석을 보내왔다.
꽃방석 쇼파에 앉아 젊은 텔레비전을 보고,
꽃레이스 식탁에 앉아 우아하고 게걸스럽게 삼겹살을 먹었다.
넷.
엄마는 자꾸 뭘 사주신다고 하셨다. 어느날은 하얀색 서랍장을 보고 오셨다고 하셨고,
어느날은 식탁을 보고 왔다고 네가 결정하라고 하셨다.
그동안 아이들 돌봐주고 살림해주신 게 선물이라고 해도
자꾸 집에다 두고 쓸수 있는 물건을 사주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결정한것이 베란다 창에 커텐대신 다는 버티칼이었다.
거실에도 안방에도 커텐을 생략하기고 결정한 이유는 커텐은 아늑해 보이는 대신 자주
손질이 간다는 것이었다. 버티칼은 몇년을 내버려 두어도 때국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베란다 창이 먼지 물로 그림을 그려 놓아도 그 더러움이 보이지 않아서
그것 또한 맘에 드는 이유다.
이유를 다 듣다보니 이건 게으름 때문인데, 뭐 먼지를 뒤집어 쓴 커텐이 흔들거리고 있음
저걸 빨아야하는데 신경이 곤두서니, 그래서 버티칼이 나 한테는 딱 어울린다.
버티칼 사이로 멀리 야경을 보면 세로로 써 있는 일산병원 간판이 제일 크다.
병원입원실 창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울까.
엄마? 건강하셔서 고마워~~~
다섯.
내겐 갑작스럽고 엉뚱하고 착한 친구가 한명있다.
친구는 유리관이 달린 벽걸이와
낱알이 다 여문 호리호리한 호밀을 산에서 꺾었다면서 가지고 왔다.
유리관엔 토끼풀 이파리를 꽂고,
호밀은 페트병에 꽂아 베란다로 이어진 격자창쪽에 놓았더니 분위기 끝내준다.
둘이 산머루주 한잔씩 마시며 분위기에 취해서 전망좋은 아파트 창밖을 오래도록 봤다.
사는 재미가 별거냐 이게 재미지..안그냐? 친구?
여섯
그 여자는 작년 초겨울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날 찾아왔었다
그 뒤부터 우린 친구처럼 연락을 하게 되었다.
명동에서 만나 영화도 보여주고
처음으로 소문으로만 듣던 김치맛이 알싸한 명동칼국수라는 것도 먹어봤다.
그리고선 버스를 타고 집앞까지 날 바래다 주던 애인보다 더 다정한 여자였다.
집을 샀다고 했더니 선물을 보내왔다.
부엌에 놓고 다용도로 쓰는 등바구니 서랍이 달린 가구였다.
정리가 다 된 다음 집으로 초대를 했다.
케익에게 34개의 초를 꽂아주면서 다음엔 34평으로 이사가세요 했다.
보라색 옷을 입고온 그녀는 붓꽃같았다.
그 여자가 우리집에 오고 간 뒤 아파트 뒷길에서 보라색 붓꽃을 보았다.
세련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 여자, 붓꽃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