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어느 겨울, 점심시간 두어 시간을 앞두고 다들 수업 듣느라 한창이었다. 추운 계절답게 보온도시락을 가져왔고 그것을 아이들은 사물함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 중 내 보온 도시락은 촌스러운 디자인에 얼마나 크기도 컸던지…….그 중 내 도시락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예전 회사에 들고 가시던 것을 고집스럽게 어머니는 거기다 내 도시락을 싸주셨던 것이다. 항상 그 보온 도시락 통을 열 때 마다 난 부끄러웠고 돈 몇 푼 아끼고자 촌스러운 아버지 도시락 통에 밥과 반찬을 싸주시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드디어 점심시간,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다들 맛있는 계란 입힌 소시지 구이에, 어묵 볶음…….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나오는 맛난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무척 실망하고 부끄러워서 얼른 다시 뚜껑을 덮어버렸다. 호기심이 발동한 한 아이가 강제로 내 도시락 뚜껑을 열었고, 그 내용물을 보자마자 초등학생의 유치함으로 깔깔거리고 비웃어댔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너희 아버지 포항 제철에 안 다니시냐?”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치솟아 오르는 분노와 함께 부끄러움으로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회사를 실직하신 것도 아닌데, 다른 애들처럼 하얀 쌀밥이 아닌 잡곡밥 투성이로 싸주신 어머니가 그때는 그리도 원망스럽던지…….그 놈의 잡곡밥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잡곡밥 보단 쌀밥을 먹어보는 것이 소원인 그 시절이 아니라, 오히려 잡곡밥이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고 오히려 흰 쌀밥 보다 비싸다는 것을 그때는 철없이 몰랐으니 말이다. 엉엉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얼른 담임선생님께서 다가오셔서 반 아이들에게 “흰 쌀밥보다 보리나 콩이 들어간 잡곡밥이 훨씬 비싸고 몸에 좋단다. 내일부터 선생님이 도시락 검사해서 잡곡밥이 아닌 하얀 쌀밥만 싸오면 도시락 못 먹게 할 거다.”
선생님의 그 배려하는 말씀이 그때는 그리도 내 마음속에 따스한 위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로 인해 그 다음 날부터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흰 쌀밥이 아닌 잡곡밥으로 싸오게 되었고, 난 그 이후로 영웅(?)이 된 듯 한 뿌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었다.
요즘 선생님의 자질이나 존경심이 무너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아이들의 건강과 마음의 상처 회복을 위해 이렇듯 노력하시는 선생님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에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또한 그때는 나에게 원망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께서 왜 잡곡만을 고집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훨씬 흐르고 투정하고 부끄러워 울던 어린 학생에서 이젠 두 아이의 어엿한 엄마가 되었다. 어미가 되니 나도 모르게 그때의 울 엄마처럼 아이들이 잘 먹지 않아도 몸에 좋다는 현미며 보리를 밥에 섞어주게 된다. 남들처럼 흰 쌀밥보단 잡곡밥으로 소신 있게 밀고 가신 어머니의 노고를 아이 엄마가 되고선 그제야 알게 되고 뒤늦게나마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철없던 그 때, 사랑과 그 정성도 모르고 어머니를 무척 원망스러워 했던 일을 회상해보면 참으로 죄송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