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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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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누웠던 자리


BY hayoon1021 2005-05-30

 

아버지는 내 결혼식 한 달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서둘러 날을 잡았건만 아버지는 끝내 내 손을 잡아주지 못 했다. 결혼예복 보러 다니던 나는 졸지에 상복을 입게 되었다. 병원 영안실에 모여든 우리 형제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미 예감했던 일인데다, 생전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구차가 출발하려는 순간, 곡소리가 너무 안 난다고 누군가가 한 마디 했다. 뜨끔해진 여자들이 잠깐 우는 시늉을 냈지만, 내키지 않는 곡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슬프지도 않았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나한테 해 준 것도 없으면서, 결혼식마저 안 보고 가 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딸도 안 우는데, 며느리들이 진심으로 울어줄 리가 없었다. 장례식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그렇게 냉랭했다. 그게 아버지가 평생 살아온 값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초상을 치른 후 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바로 올라가야 되는데도 몸은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엄마도 일하러 나가고 없는 빈 방에 이불을 깔고 드러누워야 했다. 바깥은 아직 3월 초순의 쌀쌀한 날씨였다. 오래 봐 와서 익숙한, 허나 이제는 아버지가 없어 낯설어진 방의 천정을 바라보며 나는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거라곤, 단 칸 셋방과 병원비 문제로 불거진 오빠들 사이의 갈등뿐이었다. 아버지가 살았던 그 방은 낮에도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장롱과 텔레비전을 놓고 나면 두 사람 누울 자리만 겨우 남는 좁은 방이었다. 몇 년이나 도배를 새로 하지 않아 벽지는 너덜너덜했고, 헐어버린 벽 모서리는 비질을 할 때마다 흙이 쓸려 나왔다.

그 방에 멍하니 누워 있으려니, 오전 10시가 되기 무섭게 요란한 소리가 들려 왔다. 집에서 불과 50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대형마트가 새로 생겼는데, 거기서 틀어 놓은 음악소리였다. 곧이어 젊은 여자 둘이 마이크를 잡고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듣기 좋았을 그 발랄한 목소리가, 그날은 머리를 꽝꽝 두드리는 흉기가 되었다. 설마 했는데 그 소음은 해가 질 때까지도 그칠 줄을 몰랐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런 난리가 개업하던 날부터 시작해서 벌써 며칠째 계속 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잠이나 자려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분통만 터뜨려야 했다.

그 와중에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 자리에 누워 있었을 아버지도, 온 종일 저 소음에 시달렸을 게 아닌가? 엄마가 점심상을 차려놓고 아침에 나가 버리면, 아버지는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했다.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싸운 것은 병마가 아니라 저 소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달려 나가 욕이라도 퍼부을 수 있지만,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속수무책으로 그 횡포를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핑그르르 눈물이 돌았다. 장례식 내내 굳어 있던 내 얼굴 근육은, 그제야 비로소 일그러졌다. 첨엔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나중에는 아예 엎드려서 엉엉  울었다. 내가 그렇게 울어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일하러 나가 버린 그 집은 낮에는 늘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곧 죽을 목숨이라는 것보다도, 당장 말 붙일 사람 하나 없는 외로움이 더 컸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서러움은 더 북받쳐 올랐다.

지난 날, 아버지는 정확하게 사나흘 간격으로 술을 먹고 와 엄마를 때렸다. 오빠들은 모두 독립했고, 집에는 엄마와 나와 어린 남동생만 있었다. 아버지의 폭력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힘없이 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실컷 두들겨 맞은 다음날도, 엄마는 어김없이 일어나 종이 짝 같은 몸을 추슬러 아침밥을 하고 일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아버지와 사는 동안 내가 배운 건 증오심뿐이었다. 스물세 살에 옷가방 하나만 챙겨 들고 난 아버지를 떠났다. 그 뒤 명절 때 가끔 얼굴을 비추긴 했지만, 한번 끊어진 부녀간의 정은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당뇨합병증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버지보다 병수발 할 엄마 걱정을 먼저 했을 정도로 얼어붙은 내 마음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가 누워 있던 그 자리에서 나는 오열을 쏟아내고 있었다. 왜 그토록 울었던 걸까? 뒤늦은 회한이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동안 쌓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컸다. 어쩌면 그보다는 인생의 덧없음이나 쓸쓸함, 아버지라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 내 앞날에 대한 두려움, 그런 것들이 더 앞섰던 것 같다. 

어느덧 아버지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났다. 예전처럼 날이 시퍼런 건 아니지만, 아직도 내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남아 있다. 자식 낳아 보면 부모 고마운 줄 안다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솜털 같은 내 아이들을 보면서 희열과 경이로 몸이 떨릴 때마다, 아버지는 어쩜 그렇게 자식들한테 무관심할 수 있었는지 더 궁금하고 이해가 안 갔다.

그랬던 것이 아이들이 점점 커 가고, 먹고살기는 더 막막해진 요즘에 와서는 슬그머니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아이들 앞에선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삼키는 나를 보면서, 옛날에 아버지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흠칫 드는 것이다. 술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든 것은 분명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마저 없었을 거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나? 결과를 떠나서, 자식 하나 키워내는 일이 거저가 아님을 실감하는 요즘은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흘러 지금보다 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면, 그때 다시 한 번 실컷 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