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회사 출장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재일교포 2세로 1943년에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후 한국에 시집 온 엄마의 가족들은 지금 현재에도 모두 일본에서 살고 있다.
어떤 친척들은 한국 성, 파평 윤씨를 그대로 쓰고, 어떤 친척들은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사람으로 살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 말을 매우 서툴게 하는 반 일본 사람들이다.
조금이라도 우리나라 말을 할줄 아면 그나마 다행이나 대부분이 사실은 우리나라 말 구사를 전혀 하지 못한다.
아쉽지만 현실이다. 나의 피붙이들과 나는 외국어인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엄마가 한국으로 시집간다고 했을 때 외할머니가 그렇게나 반대하셨단다.
왜 그렇게 못 사는 나라로 고생하러 가냐고, 가면 가슴치며 후회할 꺼라고...
우리 아빠네 식구들은 섬유산업을 크게 하며 상당한 재력가들로 잘 살고 있다고 엄마가 열심히 자기 부모를 설득했으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엄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협박이며 회유의 방법을 써도 애지중지하던 막내 딸이 그래도 고집을 굽히지 않고 한국으로 시집 올 결심을 내리자 외할머니는 며칠동안 통곡을 하셨단다.
결국 엄마가 쓰던 밥 그릇이며 젓가락, 숫가락을 집 밖으로 내던진 외할머니는 엄마의 결혼식에 불참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래도 마음이 약해 외삼촌들 두분과 함께 한국에 와 엄마의 결혼식에 참석해 처음으로 아빠를 대면하는 기회를 가졌다.
1967년의 한국은 참으로 어려웠나보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쓰는 집이 드물어 신문지를 오려 사용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우리나라 상황을 알고있던 엄마는 일본에서 화장실 휴지며 각종 부엌용기들, 가정용품들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왔다.
레코드도 귀한 시대라 일본에서 최신 재즈음악들이 담겨진 레코드 300장을 배로 부쳤다가 전부 도난당해 버리는 불상사도 겪었다.
그래도 부유한 층에 속해 운전사가 딸린 자가용도 가지고 있었던 아빠네 친척들은 엄마가 일본에 다녀 올 때마다 싸 들고 오는 일제 전자제품이며 화장품, 식품들에 사죽을 못 썼다.
그래서, 엄마가 일본으로 갈 때에는 트렁크 하나면 충분했으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들이 그득한 트렁크가 두, 세개 더 딸려오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는 없고 일본에서만 생산되는 그런 물건들이 많았었다.
1년반 전 갑작스런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엄마가 서울대학 병원에서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참, 우리 엄마가 바보였지. 내가 이렇게 한국에 시집 와 너희 넷 줄줄이 낳고 잘 살다 갈건데 그것도 모르고 .... 결혼식에도 안 와주고....
참 한국이 발전했어. 내가 네 아빠와 결혼 할 때만 해도 정말 없는 게 많았었는데. 일본에 비해 없는 게 너무 많았어.
일본에서 사 올게 별로 없어, 이제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코끼리 밥통 사달라고 그렇게들 부탁했었는데...
참 우리나라 대단해.
프랑스 이동통신 회사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우리나라 이동통신 업계의 눈부신 발전에 가슴이 뭉클할 때가 많다.
회사일로 일본 이동통신 회사들인, NTTDoCoMo, Vodafone KK와 일을 할 기회가 많은데 그들로부터도 자주 한국업체들이 무섭다는 얘기를 듣는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칠 정도의 부를 거머쥐려면 아직 자족하기엔 멀었고, 겸손한 자세로 더 노력해야 할 것이나 그래도 우리 엄마가 시집 올 때 화장실 휴지까지 싸 들고 와야했던 가난한 나라 한국 기업들을 이제는 일본의 기업들이 경계해야 할 정도로 되었으니 !
시나가와 프린스 호텔 32층에서 눈 아래 펼쳐진 도쿄 시를 내려다 보며 이제는 가난에 찌들어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에 시달리며 일본 사람들의 갖은 학대를 견뎌내야 했던 우리나라 재일교포들이 자기네들의 아이덴터티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이제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람임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의 뿌리를 잊지않고 일본에서 어떤 분야에 종사하고 있든지간에 한국사람으로서의 품위와 명예를 지니고 일본 사람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탁월함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