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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가던 날 라일락은 피어...(1)


BY 개망초꽃 2005-05-16

몇 초에 한번씩 향기를 뿌려대던 자동 향기기계처럼 라일락이 이사 가는 집 길목에 서 있었나보다.

 

라일락 나무를 길목 길목마다 설치를 해 놓아서 라일락 향기가 먼저 날 알아차리면 아? 5월이구나 했었다.

 

라일락 얼굴을 쳐다볼 사이 없이 며칠 전에 잔금을 치루고, 집 주인은 수요일 날 이사를 먼저 가고 나는 삼일 뒤인 토요일 오늘 이사를 가는 중이었다. 그때 받은 집 열쇠를 대각선으로 맨 가방 속에 넣고 라일락 꽃향기가 코 속을 자극해도 꽃과 눈인사도 나눌 새 없이 빠르게 걸어가야 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 음식 쓰레기통 다섯이 한 줄로 부동자세를 하고 서 있는 곳에 라일락은 피어 있었나보다 라일락 향기와 음식쓰레기 냄새가 섞여서 향기 좋네 하다가 말았다.


자물쇠가 부드럽게 열렸다. 전 주인은 학교 선생이라 했다. 어린 애가 하나 있는 젊은 여자였다. 전 주인이 열쇠를 주면서 보조키 바꾸시지 않아도 돼요. 프랑스제라서 복제가 안 되는 거래요. 만약에 키 다 잃어버리시면 자물쇠 뜯어내고 다시 달아야 해요. 열쇠 머리는 파란색이었다. 그것도 여유 있게 서너 개는 있어야할 것 같은데...딱 두 개였다. 남편하고 둘이 쓰는 거라서 두 개만 만들었어요. 네에...대답을 하면서 속으로는 아들아이가 잃어버리기 선순데 얼마못가서 외제 자물쇠 뜯어 버리게 생겼네 했다.


3월 어느 날이었나 보다. 친정엄마가 뉴스를 보다가 집값이 올라간데, 지금 집을 사는 게 좋을 것 같네. 엄마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그럴까? 그러자 하고 다음날 일찍부터 집을 보러 다녔는데 이틀 동안 다섯 집 보고서 다섯 집중에서 집수리를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놓은 집이라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창 넓은 매장을 수리할 때 매장 창을 카페 창처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매장을 수리하던 분이 카페에서나 분위기 내려고 그렇게 하지 먼지나 쌓이고 돈도 더 들고 좋지 않은데 그러시길래 마음뿐 그리 하지 못했던 걸 장사하는 동안 아쉬움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래서 하얀색 테두리 거실창문에 하얀색으로 모자이크로 분위기를 부른 창살에 난 반하고 말았다. 결혼 전에 선을 여러 번 봤어도 첫눈에 반한 사람이 없던, 즉흥적으로 물건을 사지 않던 내가, 나는 몽환적인 구성으로 몸이 만들어졌나보다. 그러니 창살 하나에 반해 계약서를 덜컥 썼으니 말이다. 집을 살까하고 말을 베어문지 이틀 만에 계약금을 지불하고선 내가 지금 뭔 짓을 한거지? 같이 집을 보러 다녔던 친정엄마도 그랬다. 가을에 살 걸 그랬나? 

집을 사 놓고서도 내가 집을 샀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가 절기상 봄이라 해도 겉으로 느끼는 기온은 겨울이나 다름없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자랑스럽게 내가 집을 샀다고 얘기를 했다.

“집을 샀어. 엄마네 아파트 옆 동, 낡은 복도식 아파트야. 이십이평.”

“그럼 됐지 더 넓으면 뭐하니? 잘했다 정말.”

“응...가을에 사려다가 더 오른다고 하길래 서둘러 샀어. 잘 산 것 같아.”

“그러게 장사한지 이년 조금 넘어서 집을 샀으니 기적이다. 대단하다.”

운이 좋았고 내가 생각해도 난 지독하고, 지독하게 돈을 차례대로 반듯하게 모아 놓았다. 한달에 몇 백씩 버는 내 장사를 하면서 난 차를 사지 않았다. 기계치고 게으름의 핑계를 조금 섞었지만 운전면허를 따면 차를 사고 싶을 것 같아서 운전면허를 따지 않았다. 정말 그래서 그랬다. 대부분의 날들을 버스를 타고 다녔다. 집에 올 때 쌀과 과일을 가지고 가려면 두 팔이 늘어날 것 같아도 버스를 탔고, 매운 겨울에도 장마비가 옷을 다 적셔도 택시를 타지 않았다. 오토면허는 쉽단다 중고 소형차라도 사라 힘들지도 않니 하면 난 집 살 때까지는 차를 살 수 없어 집 산 다음에 운전면허도 따고 차도 살거야 했었다.


 

이삿짐이 들어왔다. 이삿짐이라야 별 거 없었다. 미니 옷장과 딸아이가 쓰던 책장과 책상, 몇 가지 안 되는 부엌살림, 팔려고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가 좀 더 생각해 봐야지 하고 끝까지 우리 곁에 떠나 보낼 수 없었던 우리집 재산 목록 1호인 피아노, 물이 새는 냉장고, 십년전에 유행했던 색이 짙은 세탁기가 전부였다. 그리고 내 결혼생활의 안팎을 다 보았던 사랑초 화분 두 개와 유리를 깔아 티 탁자로 쓰던 질그릇화분. 텔레비전은 망가져서 버려야했고, 빛바랜 천쇼파는 엄마네 쓰라고 두고 왔다.


아파트 복도쪽으로 창문이 놓인 아이들 방은 파란색이었다. 큰 딸이 좋아하던 파란색이여서 딸아이 파란색 책상과 잘 어울렸다. 아...책이 좀 많은 편이다. 학원은 안 보냈어도 책은 잘도 사줬었다. 큰 아이 때 사 준걸 작은아이까지 물려 볼 수 있어서 얘들 방에 책 보따리만 펼쳐도 발 디딜틈이 없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은 따로 빼서 7살짜리 조카에게 줘야하고, 나중에 봐도 되는 책은 창고에 다시 집어 넣고, 차곡차곡 정리하니 책들이 비비적거리고 꼼짝할 수 없이 답답하지만은 책장에 들어가긴 다 들어갔다.

 

안방은 하얀색 미니 농을 한쪽으로 당겨 놓고, 앞 베란다로 창이 놓은 쪽으로 커피와 함께 먹으면 어울리는 내가 즐거먹던 과자 이름과 똑같은 유명한 침대회사 침대가 아닌, 이름도 모르는 침대회사 침대, 그의 머리를 놓았다. 침대를 살 때 저절로 딸려 오던 작은 장식장을 침대 옆에 놓고, 또 그때 서비스 품목으로 준 문양이 싼티가 나는 침대 커버를 씌었다. 작은 장식장위에 부속품이 하나 없어서 부속품을 구해야 쓸 수 있는 분홍색 천이 씌어져 있는 스텐드를 분위기 나게 놓았다. 장롱 옆에 남는 자리는 엄마가 버리라고 잔소리 하던 서랍장을 놓았다. 서랍장이 없으면 아들아이 옷은 맨바닥에 내려 놓아야 할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가지고 왔다. 엄마는 서랍장을 새로 사라는 말이었지만 아직은 망가지지 않아서 더 써도 된다고 우겼다.

그래, 그렇게 지독하니 집을 샀지 하시며 웃으셨다.

 

거실엔 하얀색 장식장을 놓았다. 십년전 아파트 입주하면 의무적으로 놓여 있던 하얀색 길다란 거실장인데, 난 이게 맘에 드는 이유는, 길어서 한쪽은 컴을 놓을 수 있고, 한쪽은 서랍장이 달려서 수납장으로 쓰면 좋고, 가운데는 유리로 되어 있어서 텔레비전을 올리고 내가 애독하는 책을 꽂을 수 있어 따로따로 이것저것 사지 않아도 돼서 경제적으로 이득이다.


라일락은 꽃으로 먼저 나를 알아보지 않았고 향기로 먼저 자신을 알게 했다. 라일락이 피면 5월이 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집을 계약할 시기는 3월이었다. 중도금 치룰 돈은 충분한데..잔금 치룰 돈이 모자라서 5월쯤으로 이사 날을 잡았다. 그러면서 그때가 라일락이 피는 시기구나 했다. 살 집을 보러가면서 라일락 나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나뭇잎을 따와서 씹어 보라고 했다. 나뭇잎은 심장모양이었다. 무슨 잎인데? 그냥 한번만 씹어봐. 무지 썼다. 무슨 잎인데 이리 써? 라일락이야. 향기는 좋은 꽃이 이파리는 되게 쓰네. 잎 모양이 하트인데 그래서 사랑은 쓰다드라. 그래? 사랑이 쓰다고?사랑이 쓰다는 걸 그때 당시에는 몰랐다. 사랑을 해 본 뒤 사랑에겐 달콤한 향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더 쓰디쓴 아픔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라일락은 사랑의 나무라 믿게 되었다. 사랑이란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보다도 유혹적이고 달콤하지만 그 뒤엔 말할 수 없이 슬픈 쓴맛이 오래 간다는 것을 ..양면성인 극과 극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라일락 나무에게 꽃이 피었다. 양면성 중에서 달콤함의 절정이다. 내가 이사하던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