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약하고, 예민하고... 남편의 성품을 생각할 때 내가 떠올리는 단어들이다.
겉으로 생긴 것은 선이 굵은 남자다.
그런 남자가 어찌나 상처를 쉽게 받는 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참 많았다.
"나 입을 옷이 마땅치 않은데..."
시외갓집에 인사가기로 했을 때 내가 한 말이다.
이 말에 남편은 불 같이 화를 내었다.
옷을 사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평이라고 들은 것이다.
사실 그 말의 의미는 임신해서 몸에 맞는 옷이 없으니 한복을 입을까 생각하면서 쑥쓰러워 변명 삼아 한 말이었는데...
어찌나 심하게 화를 내는지 변명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
"당신, 고모부를 무시해서 인사 안한 거지?..."
"아니, 내가 왜 고모부에게 인사를 안해?"
"고모부에게 인사도 안 한다고 그러던데?"
"어?... 아하..., 그것은 고모부가 안방에서 쉬고 계시는데 방해될까봐 그런 거지..."
결혼 초에 우리는 한동안 시고모네 집에서 같이 살았다.
맞벌이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데 시고모가 아이를 봐 주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고모부는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주로 밤 늦은 시간부터 아침까지 일하고 낮에는 잠을 잤다.
나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그런 고모부의 휴식에 방해가 될까봐 거실에 나와 계시면 인사를 하고 안방에 계시면 조용히 우리 방으로 들어 갔는데 그것을 그렇게 오해한 것이다.
남편은 내 말을 변명이라고, 자기 합리화라고 우겼다.
진짜 이유는 내가 청소부 고모부를 무시해서 인사를 안 한 것이라고...
결혼하고 오년 동안 맞벌이를 했다.
그것은 결혼 전 남편의 부탁이었다.
세째가 의대를 졸업할 때까지만 시집을 돕기위해 맞벌이를 해 달라고...
맞벌이를 끝내고 집에 있는 내게 남편은 말했다.
'모든 짐을 자기에게만 지워놓고 힘들게 한다...'
남편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집에서 연년생 어린 아이 둘 시중들고 살림하는 것이 어찌 보면 직장 다니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건만 그리 말하는 남편이 무척 섭섭했다.
남편은 직장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같이 일하는 동료나 상사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일도 힘들어 했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담배도 많이 피우게 된다고 하였다.
자기는 그리 힘들게 일하는데 아이들과 나는 철이 없다고 화를 내곤 하였다.
남편은 유난히 잔병이 많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몸살, 감기, 두통, 복통을 호소한다.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기도 한다.
쌍화탕이니 진통제를 달고 살기도 하였다.
삼 년 전 둘이 비슷한 시기에 오른 쪽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하는 방법이 달랐다.
남편은 암이라서 오픈을 해야하기 때문에 절개를 하고, 난 내시경 수술이란 것을 했다.
의사가 오픈해야 된다는 것을 미국의사는 내시경으로 해도 된다던데... 하고 자존심을 긁었더니 내시경으로 했다.ㅋㅋㅋ
아무튼 둘이 다 폐를 잘라내고 남편은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한다.
삼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잠자는 것도 불편하고 숨이 차고 기침이 난다고 한다.
오른 쪽에 폐가 3개인데 자기는 하나 잘라내고 나는 하나 반 잘라냈는데...
처음에는 이런 남편이 속이 좁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엄살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이해하기 어렵고 같이 사는 것이 힘들어 이혼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십여년이 지나면서 차츰 생각이 바뀌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둘이서 같이 폐수술을 하고 나서부터 남편을 좀 더 이해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와는 다르게 만들어진 사람이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남의 자동차가 붉은색인지, 은색인지, 숱하게 타고 다니고서도 기억 못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한번 보기만 해도 기억하는 사람이다.
제법 친분을 유지했던 사람도 잊고 기억 못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한번 본 사람이면 쉽게 기억하는 사람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랬나보다.
난 섭섭하게 느끼지 못하는 점도 남편에게는 느껴졌을 것이다.
임신해서 배부른 아내에게 옷을 사 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청소부 고모부가 부끄럽다고 느낀 것은 내가 아니고 그였나 보다.
그래서 내 행동을 그렇게 오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지나쳐 아마 일이 더 힘들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때론 부담스러웠겠지...
자주 아프고 더 많이 아픈 것도 엄살이 아니고 실제 아팠을 것이다.
나는 느끼지 못하는 아픔을 그는 느낄 수 있었던 것 뿐...
가끔 이제 내가 남편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겉모습은 내가 여리고 약해 보이는 여자지만 속은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남편이라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남자가 여자보다 약한 존재란다.
같이 사회생활을 하면 남자가 스트레스를 더 받는단다.
그래서 수명도 여자보다 짧은 것이라고...
여자보다 여로모로 약점이 많다고 한다.
나는 점점 더 강해져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런 남편을 보호하고 살려면 내가 강해질 수 밖에...
한 때 성경 속에 남존 여비 사상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숱하게 많은 부부싸움을 해보고 이제 그것도 이렇게 이해한다.
하나님은 여자가 강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남자에게 복종하라고 하셨구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억누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남편이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지기 싫었다.
이제는 그가 나보다 약한 존재임을 안다.
이기려고 기를 쓰지 말아야지...하고 마음을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