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으로 이사오기로 하고 아파트를 보러 다닐 때다.
부엌이 커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아무래도 음식점을 하려면 미리 연습을 해야할 것이고 부엌이 커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그런 조건에 맞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처음 본 순간 그 조건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숲 속에 위치한 아파트라서 들어오니 기분이 좋았다.
베란다 뒤쪽은 바로 숲이었다.
사슴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두 말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사를 하고 정말 베란다 뒤쪽에 어슬렁 거리는 사슴을 보았을 때 가슴이 뛰도록 좋았다.
한 두 마리가 아니고 떼로 몰려 다니는 사슴을 아침 저녁으로 보는 재미에 신이 났다.
숲 속으로 산책길도 있다기에 남편과 같이 들어가 보았다.
실망했다.
숲속이 황량하게 느껴진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 밑에는 풀들도 자라고 그런 것이 숲이라고 생각해 온 내 기대에 어긋나는 숲이었다.
나무는 있었다.
주로 향나무이긴 했지만 그런대로 숲이라 부를 만큼의 나무는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 밑으로 풀이 없다.
풀대신 선인장이 듬성듬성 나 있을 뿐...
그 후 숲 속으로 산책가자는 남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숲 속도 황량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거칠고 뻣뻣해 보이는 몇가지 종류의 풀이 있긴 했지만 황량함을 덜어주기보다 더해주는 것만 같다.
베란다에 나가 숲을 바라보는 것이 그닥 재미없이 느껴졌다.
처음엔 신기해서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상추를 던져주며 사슴을 구경하던 일도 시간이 가니 시들해졌다.
거칠고 황량해 보이는 베란다 뒤가 싫어 무엇이든 심어 가꾸리라 마음 먹었다.
가을에 겨자씨를 사다 뿌렸다.
사슴이 뜯어 먹지 않아 그런대로 나아 보였다.
겨울이 되자 먹을 것이 더 궁해진 사슴들은 겨자 잎과 꽃도 입질을 했다.
뭘 심을까, 사슴이 먹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넷에 보니 칸나는 사슴이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침 칸나를 공짜로 구할 수 있어 칸나를 베란다 뒤 쪽으로 촘촘이 심었다.
넓고 푸른 칸나 잎이 올라오면 황량함과 거리가 멀어지겠지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칸나가 드디어 푸른 잎을 내밀고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날마다 베란다에 나가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보, 이리 와 봐!"
어느 날 남편이 부른다.
"사슴이 칸나 잎을 다 뜯어 먹었어..."
달려가 보니 칸나 잎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사슴이 밉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리로 이사했는데...
사슴이 뛰노는 숲= 거칠고 황량한 숲. 이런 등식이 성립하는 줄 정말 미처 몰랐다.
이 다음엔 사슴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 집을 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