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
- 당신에게
잠을 잘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일거리에 손조차 댈 수도 없을 만큼 나는 지쳐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 밤 늦게까지 홀짝거렸던 소주잔과 빈 병 두서너 개가 거실 바닥에 나처럼 널부러져 있는 날들이 계속되고,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두덩이가 내 삶만큼 무거워 하루를 견뎌내는 것조차 막막하고 두려워요. 햇살은 저렇게 찬란한데, 내게는 더 이상 빛이 없어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고, 입을 열어 존재를 알려야하는 데도 예전의 언어들이 기억나지 않아요.
오늘 만난 사람들에게 나의 안부를 알려야하고 변함없이 큰소리로 주접을 떨고 웃으며 안녕하다는 것을 전해줘야하는데, 그들이 누구였는지, 내게 얼마만큼의 무게로 다가섰던 사람이었는지, 나는 오늘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보여줘야하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어요. 나는 다만 숨을 쉬고 있을 뿐이고, 한 달 치의 먹거리를 위해 일을 할 뿐이고, 집과 직장을 오고가는 최소한의 행위로 시간을 죽여가고 있을 뿐이에요.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는 것도, 아이들을 두둘겨 깨워 도시락을 들려 등교시키는 일도, 아침에 샤워를 하고 밥알을 씹어제끼는 일도, 화장대에 앉아 입술선을 그리고 볼터치를 하는 일도, 이젠 화가 날 뿐, 의미가 없어졌어요. 당신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머리가 길어도 퍼머를 하지 못하고 당신의 감동을 기다리는 내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일어요. 우리의 만남이 아픔으로 끝날 거라는 거 당신이 내게 먼저 말했잖아요. 날 놔줘요. 난 아니에요.
차 위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도, 핸들을 잡은 손가락 사이로 벗겨진 손톱칠도, 친구의 안부 전화도, 더딘 시침의 답답한 움직임도 내겐 부질없어요. 난 그들 밖에 있어요. 이제 더 이상 난 그들과의 사이에 아무런 고리가 없어요. 내가 버림받은 거에요. 내가 그들을 버리려했으므로, 영악한 그들이 나를 서둘러 외면한 거에요.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있어 내가 이렇게 쓸쓸하고 허망한 거에요. 당신만 아니면, 난 얼마든지 씩씩하게 걷고, 머리를 흔들며 웃고, 주접스럽게먹을 수 있었을 텐데,모두 당신 탓이에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새벽 일찍 일어나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준비했을 것이고, 서둘러 청소기를 돌려 어제의 먼지들을 흔적도 없이 정돈했을 것이며, 점심 때 간소한 김밥이나, 컵라면으로라도 넉넉할 수 있도록, 꾸역꾸역 김치국을 끓여 밥을 말아먹고 설거지까지 마쳤을 거에요. 당신의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매일 같은 시간에 분첩을 열고, 아일라인을 정성껏 그리고, 가끔은 인조 속눈썹도 붙여보며 혼자 그 바쁜 아침 시간에 낄낄거리고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을 텐데, 모든 건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만 아니라면, 당신을 그렇게 믿고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외롭지 않았을 거에요. 가끔은 사는 게 참 힘들다고, 친구 앞에서, 혹은 직장 동료들과 회사 앞 닭갈비집에서 유쾌하게 넋두리하며 툭툭 지친 하루를 털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이 나빠요. 당신 때문에 나는 그 유용한 일들과 나 사이에 정확하고도 선명한 금을 긋고 말았어요.이제 나는 툴툴거리면서 사는 거 정말 징글맞다고, 연애나 한판 걸죽하게 하면 더 재밌지 않겠느냐고, 애가 커서 브래지어 사이즈가 나하고 같다고, 이젠 같이 목욕하는 것도 좀 쑥스럽다고, 부장이 신입 여사원 아무개를 보는 눈이 좀 음흉하다고, 손바닥을 마주부딪치며 허리를 뒤로 제끼며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당신이 빼앗아간 거에요. 난 이제 당신 아니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도, 세상의 그 무엇의 의미를 소중히 여길 수도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부탁이에요, 나를 떠나 주세요. 더는 내게 마주 앉아 웃으며 낄낄대는 것이, 몇 시간 씩 전화통을 붙들고 사랑 타령을 하는 것이, 옷깃을 여며주고, 손바닥을 간질거리며, 커피에 프림을 반 스푼 넣어주는 행위 따위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세요. 아직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멀리서 보기만 해도 고개 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여겨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제발 나를 당신 주변의 다른 여자들처럼 쉽게 대해주세요.
아주 멀리, 영원히 당신의 존재가 더이상은 내 쓸쓸하지만, 평화로운 삶에 끼어들 수 없게 나를 잊어주세요. 당신이야말로 나를 제발 버려주세요. 나를 제발 그냥 내버려둬요. 당신을 벗어나야 내가 살아요. 난 아름답게 늙고 싶어요. 부끄럽지 않은 엄마로 늙고 싶어요. 아직은 당당한 직장인으로, 가끔은 푼수끼 넘치는 아줌마로, 배도 보기좋게 나오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아이쇼핑도 맘껏 할 수 있는 그런 여자로 늙어가고 싶어요. 당신때문에 외로워 지는 건, 당신이 있어 나약해 지는 건, 당신이 내게 힘이 되는 건, 정말이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를 나로 살 수 있게 도와줘요. 속상하고 화가 나요. 이러면서도 아직도 당신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내가, 당신의 따뜻한 음성을 기다리는 내가,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당신의 깊은 눈빛을 그리워하고 있는 내가, 정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요. 나는 결코 당신을 벗어날 수 없는 건가요? 말해봐요,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 지.
라사의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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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만 '주홍글씨' 소설 속에서 -
http://cafe195.daum.net/_c21_/home?grpid=y6Z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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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다르지만, 영화 '주홍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