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봄, 강아지 이런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심상은 아마 따사로움이 함께 묻어나는 사랑스러움일 것이다. 선물 또한 그런 기분 좋은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엄마 없이 자란 아이에게 ‘엄마’라는 말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갖고 있다. 선물도 갖가지 갚진 추억을 담고 있을 테지만, 나에겐 아직도 짐처럼 미안함이 남아있는 말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가까이에 학교가 들어오게 되면서, 우리가 들어간 중학교는 다섯 반이던 학생수가 반으로 줄어 남자반 한반과 여자반 한반으로 편성 되었다. 그 때는 혼합반은 생각지도 않았었기에 우리는 3년 내내 같은 반 아이들과 동거동락을 했어야 했다.
1학년의 새내기 시절을 삼총사로 가깝게 지낸 친구가 겨울방학 할쯤에 우리에게 인형을 선물했다. 어렸을 적에도 인형을 갖고 놀기보다는 산과 들로만 뛰어 돌아다닌 나에게 사뭇 다른 느낌의 선물이었다. 섬머슴 같기만 했던 나에게 누군가를 챙기고 알아준다는 의미있는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춘기의 감수성을 자극해주는 그 친구는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 불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도 참 여성스러웠던 것 같다.
개학을 하고 봄이 되면서 그 친구의 생일이 다가왔다. 고민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친구에게 꼭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농사일을 하시면서 네 자매를 키우시는 엄마에게 일일이 친구의 생일을 챙긴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보는 것이 미안해지고 그런 미안한 마음이 부담스런 마음으로 발전하여 급기야는 그 친구와 멀어지게 되었다. 사춘기의 나에겐 그런 미묘한 일들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 친구는 여름방학을 뒤로 하고 전학을 갔다. 나의 마음 속 짐을 그렇게 남겨둔 채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못하고 말이다.
선물하면 아직도 미안함을 저버리지 못한 그 친구가 생각난다. 지금은 부디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기원하면서 언젠가는 만나서 선물을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