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향이 시골이다. 시골에서 나서 자랐고 많은 것을
보고 느꼈으니 아직도 나의 메모리의 많은 부분은 시골
풍경이 자리잡고 있다.
아컴에 들어오는 달아님의 '순이 이야기방'에 가면 잘 찍은
보리밭 풍경이 있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보고, 시를 읽으니
갖가지 고향의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넓은 들에 깔린 보리밭 모습도 멋지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넘어지고 망가진 보리밭 사진을 보는 것이다. "잠을 잔
것 같은데 그 주인공이 누구일까?"하고 상상하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면 생각나는대로 몇 가지 추억을 소개해 본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다들 가지고 있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번 옛날로
돌아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추억1. 겨울 보리밭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보리가 파랗게 난 밭은 더 추워
보인다. 겨울이라서 밭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를 않은데
파란 보리가 추운 겨울 밭에 혼자 있으니 굉장히 추워
보였다.
아침에 서리라도 내려서 파란 보리가 하얀 옷이라도 입으면
훨씬 더 추워보인다. 나는 보리밭을 지나며 "보리야 춥지
않으니? 조금만 견더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따뜻한 봄이
올거야."하고 말을 주고 받았었다.
추억 2. 보리밭 밟기
초겨울과 해빙기인 2월 하순~3월 초순에는 토양의 수분이
얼었다 녹았다 하므로 땅에서 서릿발이 솟아오른다. 그러면
보리의 뿌리가 들떠서 죽는다고 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보리밭 밟기를 한다. 골고루 자근자근 밟아서 솟아오른 보리
뿌리를 다시 땅속으로 내리게 해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장난 같아서 재미있는데 나중에는 힘이 들고 해서
꾀가 나면 건성건성 밟는다. 그러면 어른들이 금방 알아차리고
야단을 치셨다. 초등학교 선배 한 분은 지금 판사를 하고 있는
데 보리밭을 밟으면서도 책을 보다가 나중에는 이랑을 벗어난
적이 많다고 한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그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추억 3. 보리 바심
곡식을 베어서 타작하는 것을 우리말로 바심이라고 한다.
이 바심하는 날에는 이웃에 사는 분들이 다 함께 모여서
협동작업을 한다. 농사일이란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것이 훨씬 능률적이다.
보리 바심을 하는 날은 껄끄러운 보리 가시가 온통 집안을
뒤덮는다. 몸 속으로 보리 가시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목에다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서 타작을 한다.
그래도 하루종일 일을 하면 저녁에는 눈만 보일 정도로 먼지를
뒤집어 쓴다.
해가 떨어지고 바심이 끝나면 광에는 보릿가마가 쌓인다.
저것이 우리 가족이 먹을 양식이라고 생각하면 먹지않아도
흐뭇하고 배가 불렀다.
추억 4. 보리 이삭줍기.
보리 수확이 다 끝나면 보리 밭에는 다른 작물을 심는다.
고구마도 심었고 콩 등을 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확을 마친 후에 보리밭에는 보리 이삭이 떨어져 있다.
베어서 묶을 때나 또 보릿단을 나를 때 보리 이삭이 잘라져서
밭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부모님이 그릇을 가지고 다니면서
줏어오라고 하셨다. 힘들여 농사를 지은 것을 한 톨이라도
헛되이 버리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당시 어른들은 곡식의
중요성과 그것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손길을 거쳐야 하는지를
이삭줍기와 같은 행동으로 가르치셨다. 풍요의 세대라는 요즘의
아이들은 그 같은 사실을 아는지...
얼마 뒤에 미술 시간에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는 여인들'이란
그림을 봤는데 그것이 우리의 시골 풍경과 같아서 친근감이
들었다. 우리가 프랑스 하면 '예술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어
화려한 루부르 박물관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나라도 시골 풍경은
소박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추억 5. 보릿가루
내가 어렷을 적에는 간식이래야 감자를 쪄먹거나 감, 밤 등
과일이 전부였다. 초여름에는 과일도 없고 먹을 것이 없다.
그런데 보리수확을 하면 보리를 볶아서 방앗간에 가서 갈아
온다. 그러면 이것이 보릿가루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물에
타서 먹기도 하고 설탕을 섞어서 숱가락으로 퍼 먹으면 좋은
간식거리가 되었다.
추억 6. 보리밥과 열무김치
내가 어렷을 적이 지금부터 40년 전이니 당시의 우리나라는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때다. 농촌의 벼농사라고 해야 별 수
없어서 봄미 오기도 전에 보리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나마
보리도 충분히 먹을 수가 없었으니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때우는 집들이 많았다.
우리 집도 당연히 쌀이 떨어지면 보리밥으로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가장 어른이니 쌀과 보리가 반반 정도 섞인 밥을
드셨고 나머지 가족들은 새까만 꽁보리밥을 먹어야 했다.
여름에 초등학교에 갔다 오면 부엌 마루의 대나무 광주리에
있는 보리밥을 퍼서 열무김치에 고추장을 퍼 넣고 비벼서
먹었다. 요즘에는 건강식으로 열무김치 보리밥을 파는 식당
에나 가야 먹을 수 있는 것을 그 당시에는 일상 주식으로
먹었던 것이다. 시커먼 보리 찬밥은 숱가락으로 푸면 슬슬
굴러다녔다. 그만큼 끈기가 없었다.
그래도 그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니 다행이었다. 그것도
모자라고 없어서 배를 곯는 집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추억 7. 보릿대 여치집
보리바심을 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보릿집이다. 이것은 땔감으로
쓰이거나 ??혀서 퇴비로 쓰였다.
그런데 이것을 보리 이삭이 달렸던 윗부분을 잘 맞춰서 자르면
반질반질한 공작감이 된다. 즉 여치집이나 기타 다른 공작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밑바닥을 열십자(十字)로 만들어서 계속 감아 올라가면 아주
재미있는 여치집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들에 나가 여치
를 잡아다 넣어서 나무 기둥에 걸어놓으면 밤에 여치가 "찌르
륵 찌르르"하고 울어댄다.
추억 8. 넘어진 보리밭
보리가 다 자라서 밭을 가득 메우면 걱정거리가 하나 생긴다.
다 자란 보리가 넘어질 염려가 생기는 것이다. 보리가 넘어
지는 것은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바람이 불어서 보리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대량으로
쓰러지는 경우이다. 이것은 자연 재해이니 어쩔 수가 없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입장에서는 참 속상한 일이지만 한 쪽으로
넘어진 보리밭은 그런대로 멋이 있다.
둘째는 집에서 기르는 송아지나 개 등이 들어가서 다 지은
농사를 망쳐놓는 것이다. 큰 집승이야 묶어서 기르지만 작은
송아지나 개는 놓아먹이기 때문에 돌아다니며 피해를 준다.
피해 정도가 크면 추적해서 피해보상을 시키지만 소소한
피해는 눈감아 주는 것이 시골인심이었다. 속상하다고 해서
이웃집 송아지나 개를 잡을 수는 없으니까.
셋째는 사람이 보리를 넘어뜨려 놓은 경우가 있다. 짓궂은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보리밭에 들어가서 보리가 넘어
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누가 봐도 성인이 누워서 잔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한 사람은 아니고 분명이 두 사람이 누워서
잠을 잔 것으로 보인다. 그럼 누가 그 껄끄러운 보리밭에
누워 잤단 말인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 잤다면 같은 남남
이나 여여가 자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한 쌍의 남녀가
밤에 와서 잠자리를 꾸민 것이다.
요즘에야 여기저기 러브호텔도 많고 승용차도 많아서 남의
눈을 피해서 사랑을 나눌 장소도 많지만 옛날에야 겨울에는
물레방앗간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농작물이 자라는 계절에는
보리밭이나 밀밭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렇게 동네 처녀 총각이 다 지은 보리농사를 망쳐
놔도 주인은 화를 내거나 기분나빠 하지 않았다. 왜냐면
보리밭에서 사랑을 나누면 그해 풍작을 가져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주인공들도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찐한 사랑을 나누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말이다. "어떤 애들이 일을 치뤘구먼!
올 농사 풍년 들겠어."
몇 년 전에 직장 근처에 화랑이 많아 우연히 들린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극사실화로 그린 보리밭에 여인의 누드를 정밀하게
그린 그림을 보니 고향의 넘어진 보리밭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보리밭의 작가'라는 이숙자님이 그린 것으로 그림 속의 여인은
이브라고 한다. '이브와 보리밭' 제목도 에로틱했고 파란 보리
이삭이 깔린 보리밭에 누워있는 이브의 나신은 정말 강한 생명력과
원시에의 향수를 느낄 수 있어 짜릿한 전율을 맛보게 했다.
이제는 수지타산이 맞지않아 점점 보리농사를 짓지 않아
우리의 먹거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보리. 건강에 좋다고
하여 유명식당에나 가야 먹을 수 있는 보리밥. 그 보리,
보리밥에는 우리민족의 배고팠던 설움과 가난의 애환이
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