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씨를 뿌려 둔 켈리포니아 파피에 물을 주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렀다.
꽃밭에 물을 주고 들꽃구경을 가고 싶어서다.
모자도 챙기고, 지도도 챙기고...
가게 자리로 가는 길, 고속도로변에 블루버넷이 한창이다.
인디언 페인트브러시의 빨강꽃도 선명하다.
기생초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기억하는 노랑꽃이 블루버넷과 같이 섞여 하늘거린다.
분홍색 프림로즈도 질세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찔레꽃을 닮은 하얀꽃도, 야생 부추꽃도, 자주달개비를 닮은 꽃도, 야생 겨자의 노랑꽃도 흐들어졌다.
그 밖에 이름도 모를 수많은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섞여서 고속도로변을 수놓고 있다.
"어머 어머... 어쩜~... 저기저기 저 꽃은 뭐지?... 너무 이쁘다... "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남편은 한심해 한다.
"그저 눈에 뵈는 것은 꽃뿐이니...ㅉㅉㅉ..."
남편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좋기만 하다.
"어차피 한세상 살다가는 것, 이쁜 꽃을 잘 찾아내는 눈이 밉고 지저분한 것을 잘 찾아내는 눈보다 낫지 뭐..."
남편은 옆 개울에 가서 물을 떠 오고 나는 꽃밭을 둘러 본다.
건물 옆자리에 옮겨심은 앨리섬이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하얀 꽃무더기가 구름처럼 피어나고, 달큰한 향기가 오가는 이의 발길을 붙들어 코를 킁킁거리게 하겠지...하는 상상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난다.
앨리섬 한포기 한포기 사랑을 담은 눈길로 더듬어 가다 그만 감전이 된 듯 멈추어 섰다.
난디나 두 포기가 사라지고 텅 빈 시커먼 구덩이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울컥 목울대에 뭔가 밀고 나오려 한다.
꿀꺽 삼켜 밀어넣고 나니 눈가가 시큰해진다.
끔벅끔벅 눈을 껌벅여 그 마저 밀어넣고 다시 바라 봐도 가슴은 먹먹하다.
쓕쑥 자라나는 새순이 씩씩해 보였는데...
남편이 알면 속상해 하겠지..., 어떻게 말하지?...
개울에 내려가 물을 길어나르느라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고 했는데...
남편에게 정말 미안하다...
내 기분도 모르고 지나가던 홈리스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예전에 한국사람에게 태권도를 배웠다고 우리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이다.
꽃이 날마다 이뻐진다고 칭찬을 한다.
그 사람에게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꽃이 이쁘다는 말에 고맙다고, 태권도 사범을 들먹일 때 나도 그 사람 이름을 들었노라고, 블랙벨트 이야기에 한국에는 블랙벨트가 많다고 은근히 자랑도 하였다.
덧붙여 누군가 나무를 훔쳐갔다고 응석도 부려본다.
같이 속상한 척 맞장구를 쳐 주니 그나마 좀 기분이 나아진다.
그 사람을 보내고 다른 쪽에서 물을 주고 있는 남편을 손짓하여 불렀다.
"왜?..."
남편이 다가왔다.
말없이 빈 구덩이를 가리켰다.
남편의 눈치를 보니 그도 내 눈치를 본다.
처음과 달리 화도 내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달랜다.
"그럴 줄 알고 시작한 거잖아..."
"......"
나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이런 때는 오히려 많이 속상한 척 남편의 위로를 받는 것이 낫다.
위로하느라 남편이 속상해 할 기회를 놓칠테니까...
"또 사다 심자고... 자꾸자꾸 사다 심지 뭐...허허..."
"싫어... 가게 열 때까지 그냥 둘래... 사다 심으면 뭐 해, 또 퍼 갈텐데... 그리고 같은 종류도 더 이상 없었잖아. 지난 번에도 같은 걸 구하려다 못 구했는데..."
넋을 놓고 있는 내 눈 앞에 팔랑팔랑 어디선가 나비 한마리가 날아와 이꽃 저꽃 위로 날아다닌다.
까만 바탕에 동그란 노란 무늬가 있는 작고 귀여운 놈이다.
나비의 움직임따라 눈길을 쫓다보니 절로 이쁘다는 생각이 솟는다.
나비가 팔랑거리며 빌딩 숲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반짝하며 즐겁던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나무를 훔쳐가는 사람이 원망스럽고 미운 생각이 자꾸 든다.
이 때다.
어디서 또 다른 나비가 나타났다.
오렌지색 바탕에 짙은 갈색 무늬가 있는 중간 크기의 나비다.
그리 신기하고 예쁘게 생긴 나비는 아니지만 나폴나폴 날아다니는 모습이 아름답다.
잠시 머물다 그 나비도 떠났다.
나비를 바라보는 동안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내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그래, 모두를 꽃밭에 찾아드는 손님으로 생각하자... 꽃도둑도 나비도...
어찌 반가운 손님만 있을까... 때론 불청객도 있기 마련이지... 불청객은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댓가인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