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서 내려보니 며칠 전 움터있던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화사한 옷으로 몸단장하여 봄 마중을 나온 매화를 맞으려 입은 채 그대로 내려갔다. 창가에 쏟아지는 볕과 다르게 바깥 기온이 겨울을 붙들고 있었다. 다시 올라가 두꺼운 옷을 갈아입으려다 내친걸음이라 그대로 매화 곁에 다가 갔다.떨어져서 본 매화는 화사하고 발랄하기 그지없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본 매화는 몹시도 떨고 있었다.
봄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세상에 알리려고 나온 매화는 볕 바른 곳에 있는 작은 새싹들에게 먼저 눈인사를 보낸다. 잔설이 두려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잔디 속에 잠든 풀들도 기지개를 켠다. 크지도 않은 작은 꽃망울을 터뜨려 봄을 맞으려 왔지만 주위에는 친구가 없다. 간밤에 내린 눈꽃이 잠시 머물러 주었다가 햇살이 퍼지자 떠나버려 더욱 애처로운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맞은편에 자리 잡은 모란은 아직 싹이 트려는 기미도 보이질 않는다. 많은 시녀를 거느리고 여왕처럼 나타나 우아하고 화려함을 과시하는 늦은 봄 넉넉한 자태는 ‘영원불변’이라는 꽃말을 낳게 한 모양이다. 용모만큼이나 위엄을 갖추어 봄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은 선택된 꽃, 꽃턱이 씨방을 둘러싸 많은 수술 가운데 암술이 보호를 받는 교태(驕態)는 군림하는 여왕같이 보였다.
매화는 철들기 전 멋모르고 시집간 수줍은 새색시가 긴 겨울의 인고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 밖
으로 서둘러 도망나온 가련한 잉부, 힘겹던 시절이 지나고 따뜻하고 살기 좋은 봄이 오면 다른 동료들이 기량껏 멋부리며 꽃피울 때 늙어져 버린 매화는 매실이란 열매를 세상에 남겨주고 일생을 마친다.
세상살이도 자연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까 죽도록 고생을 하고 일찍 간 친구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육이오 전사자, 딸 하나를 낳은 엄마는 어려운 시절 딸을 시모님께 맡기고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포목을 이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현금이 없으면 곡식도 받는 물물교환시대 보부상, 어려운 살림에 아버지 없는 딸을 가르치기 위한 어머니의 모성애가 엄마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친구가 중학교 다닐 때 엄마는 띄엄띄엄 밤을 새고 오더니 어느 날 시모와 친구가 없는 사이 한 줄에 쪽지도 없이 간단한 옷가지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때부터 엄마를 기다림은 결혼까지 이어졌다. 입을 다물어버린 친구는 누구에게도 가슴을 열지 않았다. 낮에는 공장으로 밤에는 야간고등학교로, 손녀의 고생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고모들의 보살핌이 있었다지만 모두가 어려웠던 때 살림살이는 질녀에게 큰 도움은 줄 수 없었다.
군경 유자녀인 관계로 졸업 후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안정을 찾은 후부터 친구와도 어울리고 결혼도 해 행복해하였다. 행복도 잠시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가 결혼하고 일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시대를 잘못 만나서 태어난 한국역사가 만들어준 고아, 할머니가 가신 슬픔이 친구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곁에서 바라본 듯 할머니가 가신 후 딸 집으로 찾아온 엄마를 친구는 냉대했다. 딸을 두고 간 야속함과 할머니의 대한 그리움이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친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 이후 엄마는 다시 딸을 찾지 않았다.
운명의 신은 친구를 따라다녔다. 친구의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사표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살던 집까지 팔아서 시작한 사업은 좀처럼 풀리질 않았고 남편은 바람까지 피운다고 가까운 친구에게 심정을 털어 놓았다. 아들 둘이 중, 고등학교 다닐 때 맘의 병은 모든 병을 싣고 왔다. 좀 쉬라고 권하는 동료들께 아들의 대입을 눈앞에 둔 엄마는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 병을 숨긴다고 까지 했다.
간암, 고혈압, 당뇨는 친구의 삶을 앞당겼다. 자식에게는 엄마 없는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엄마와 같은 삶을 아들들에게 안겨주고 친구는 갔다. 우리가 상문 갔을 때 고모 둘의 울부짖음은 친정엄마를 대신 했다.
친구가 없으니 자연 발길도 멀어졌다. 아들들의 근황도 궁금은 했지만 죽은 자와 관계는 빠르게 지나갔다. 맘에서 잊혀갈 무렵 시장에서 낯선 총각이 내 친구를 부르기에 멀뚱히 쳐다보니 어머니의 친구가 아니냐 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친구의 아들을 껴안고 주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제대 후 다음 학기 복학 준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가신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하더라는 얘기를 듣고 바르게 자란 아들에게 감사했다.
겨울과 봄의 갈림길에서 매화꽃을 들여다보니 내 친구 일생과 흡사하다. 옷이 얇아 매화와 나는 한 몸인 듯 떨고 있다. 힘들게 세상을 살고 간 친구, 모란같이 좋은 시절도 누려보지 못하고 자기를 옹호해 줄 많은 수술도 감싸 줄 꽃턱도 없었다. 화려함도 우아함도 여왕의 자태도 아닌 작은 꽃잎으로 열심히 살다가 갔다. 단단하고 쓸모 있는 열매를 맺기 위해 그 겨울을 이기고 나왔다가 서둘러 간 내 친구, 그 아들들이 다져 갈 세상은 밝고 빛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