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초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 십주년이 다가왔다.
내가 늘 바라는 특별한 이벤트는 고사하고,
한번도 기념일을 스스로 챙겨준 적이 없는 미련 곰탱이랑 살다보니
어떤 기념일이나 생일이 되어도
'이번엔 기억하나 못하나 보자'고
벼루고 있기보다 나는 이미 내 기념일은 스스로 잘 챙겨먹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무슨 기념일날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나는 이미 한달쯤 전부터 매일같이 내 입으로 나수리며-주)지껄이며-
반 강제적으로 울 곰곰이를 세뇌시켜서 선물을 받아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내가 말하는 걸 기억하고 원하는 선물을
챙겨오는 법은 없었다.
아침마다 벌건 볼펜으로 떡칠을 한 달력을 들이댄 까닭인지
기념일은 그럭저럭 기억하는데 꼭 선물은 엉뚱한 걸 골라오곤 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늘상 별 기대는 없었지만
울 곰곰이가 웬일인지 이번엔 자기 입으로 결혼십주년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을만한 걸 해 보자고 선언했던터라
나도 모르게 은근히 뭔일을 벌일려나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D-day를 일주일 남긴 주말에
울 곰곰이 왈
"여보야 우리 결혼십주년에는 기대해도 된다.
내가 여행갈라고 휴가도 받아놨거든.
주말 끼워서 3박4일 정도로 여행가자."
나 눈둥그레지며
"그래? 어머 자기야 그럼 어디로 갈건데?"
"음 당신이나 나나 원래 여행스타일이 계획없이 다니는거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큰 스케쥴만 잡고 나머진 우리 기분내키는대로
다니면서 하고 싶은대로 하자."
"응, 좋아좋아"
"글고 우리 아끼던 아이스와인 있잖아.
나 캐나다 갔다오면서 사온거, 다 선물하고 한병 남은거
아끼느라고 지금까지 못 땄는데 이번 여행 때 갖고 가서
우리 축배할 때 마시자. 자기도 좋지?"
"응 나야 대 환영이지".
'근데 이 미련곰탱이가 말도 잘하고 웬일이래?'
그리고 나흘뒤 목요일날 아침이었다.
울 곰곰이 아침에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비실럭비실럭에다가 어기적어기적.
"자기야 왜그래?"
"응 별일아냐, 치질이 도졌나봐.
밀어넣었으니까 좀 있음 괜찮아질거야.
치질이란게 뭐 늘 더하다가 덜하다가 그러니까 걱정마"
"그래? 그래도 조심 좀해라.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응 알았어"
우째 장가들면서 하수구 점검도 안하고 왔는지,
결혼전부터 앓아왔던 고질적인 치질을
결혼한 몇년후에 수술을 했는데 돌파리 의사였던지
완치가 되지않아 가끔씩 도지던 탓에 우리 집은 거의
치질에 치료하는 약들이 종류별로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래서 난 또 그러려니하고 잊어버렸다.
아이구야 근데 금요일날 낮이었다.
오후에 출근한 곰곰이로부터 때르릉 전화가 왔다.
"여보야 나 똥꼬-이런 표현이 허락될런지는 모르겠다만
울 곰곰이의 표현이다-가 탈났나봐.
점심때 화장실에서 빠진후로 원위치가 안된다.
무진장 아파서 앉아있기도 힘들고 그냥있어도 아파죽겠다.
어쩌냐?"
난 이 순간에도
"혹시 우리 여행 못가는거 아냐?"
소리가 먼저나왔다. 미안하게도
"아니 그건 괜찮을거야. 전에도 그러다 말았으니까
오후에 병원가서 약 처방받으면 여행은 차질없을 걸"
그리고 그날 오후 우린 이도시에서도 유명한
항문전문병원의 전문의 앞에 나란히 앉았다.
당연히 간단한 진료후,
주사한방정도와 여행다닐 동안의 약 처방을 기다리면서.....
울 곰곰이의 똥꼬를 진료후 나온 의사선생님,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개지더니
"세상에 내가 항문전문의로 꽤 오래 진료했지만,
이렇게 활짝핀 꽃은 첨입니다.
완전히 만개를 했군요."
병도 병나름이지 그말에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혹여라도 여행을 못가게 될까봐 난 용기를 냈다.
"저.... 선생님,
저희들 내일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그러는데요,
그래도 처방 받고 간단한 치료만 함 여행은 갈 수있겠지요?"
"글쎄요, 하루정도에 한두시간정도의 거리는 몰라도
그 이상은 무릴텐데요.
이 상태로 지금까지 버틴게 참 놀랍습니다.네.
지금 수술하지않으면 출근하기도 힘들겁니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선생님 경우는 아마 한 이틀 입원하시고
집에서 한 이틀 쉬셔야 할겁니다."
게다가 그 선생님 말로는 워낙에 심해서
수술후에도 기능에는 이상 없지만
똥꼬 모양은 이쁘게(?) 나올지 장담 못한다는 거였다.
아이고 망했다.
우린 선생님을 앞에두고 한참을 상담하고 고민후에
결국은 모든 걸 포기하고 결혼십주년 기념으로
곰곰이의 고장난 하수구를 고치기로 결정했다.
'아이구 안 하던 짓을 하더라니 아예 하늘이 말리누만.
휴가날자도 아주 수술시간에 회복시간까지 맞춰서 날 받았네그려.'
.
.
그리고 우린 결혼십주년을 위해 받은 휴가를
곰곰이는 엉덩이 처들고 끙끙거리며,
나는 그 곁에서 시중드느라 끙끙거리며,
사흘을 보낸후 퇴원했다.
울 곰곰이가 여행경비로 생각했던 돈은 어찌그리도
병원비랑 딱맞게 떨어지는지......
하루 입원비는 하루호텔비랑 똑 떨어지고 ,
수술경비와 나머지 식대랑 우리 나흘여행잡비랑 거의 똑 떨어지고.....
그렇게 우린 결혼십주년 기념으로 서로에게 큰 선물을 했다.
난 우리 곰곰이에게 새로운 이쁜 똥꼬를......
그리고 그는 나에게 장담했다시피
그로선 스스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실행할수도 없는
끝내주는 이벤트를 벌이며....
그것도 똥꼬에 불붙인채로 온 몸을 불 살라가면서.....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에게 해주는 이런 이벤트는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그 병원에서는 치질에 관한 한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다는 후문이지만
그 뒤로 울 곰곰이 하수구는 별 사고 없이 잘 사용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