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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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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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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미안해...


BY 낸시 2005-02-25

"살구나무는 산성토양을 좋아한다는데 여기는 알칼리성 토양이라 잘 자랄 것 같지가 않아..."

"여기가 알칼리성 토양이래?"

"흙을 파 보면 온통 라임스톤 투성이잖아...토양이 산성으로 변하면 석회를 뿌린다고 하는데 라임스톤이 바로 그 성분이거든..."

"그럼 어떻게 하지?"

"유황성분을 뿌려서 흙을 중화시켜야 되는데 쉽지 않지..."

"......"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산 나무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

"......"

"계획을 세우고 나무를 사야 되는데 당신이 서두르는 바람에 나무를 먼저 사 놓고 그다음 거기에 맞춰 배치를 하려니 어려워..."

"아, 그거야 당신도 동의를 해서 산 거잖아..."

"흙을 먼저 만들고, 전체적인 계획을 세운 다음에 나무를 사야된다고 해도 당신이 자꾸 서둘렀잖아."

"......"

"난 쥬니퍼가 별로 안어울린다고 그랬는데 당신은 자꾸 그것을 사고 싶어하고..."

"그러면 반환시키면 될 거 아냐...자기도 동의하고선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니라고 해도 당신이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자꾸 쥬니퍼 이야기를 하니까 그럼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한 것이지..."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했으면 내버려두지 이제와서 그럼 왜 이러는 거야?"

"당신이 원하는 나무를 샀으면 끝까지 당신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 되는데 이제와서 나보고 하라니까 그렇지... 난 처음부터 당신하고는 생각이 달랐는데..."

"......"

"난 당신이 이해가 안돼, 전체적인 그림도 그리지 않고 자기 맘에 드는 나무라고 덜컥 사놓고... 또 나중에 맘에 드는 나무 사고... 그런 식으로 나무를 심으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기가 힘들잖아..."

"그럼 옮겨심으면 되지..."
"옮겨 심는 것이 뭐 쉬운가, 나무가 자리를 잡으려면 일 이년 걸리는데 자꾸 옮기면 어떻게..."

"당신 이런 식으로 자꾸 나를 비난할래? 나는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해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

"나 하고 싶은대로가 아니고 당신하고 싶은대로잖아... 끝도 못 맺을 것이면서... 난 측백나무도 별로 심고 싶지 않은데 그것도 당신이 우겨서 사고...난 풀꽃들을 심고 싶어서 빽빽한 나무는 싫은데 측백나무는 풀꽃들과 함께 심기는 미련해 보여..."

"당신 이런식으로 날 비난할래?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당신은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않고 당신 고집만 세우잖아... 날 위해서 한다고 말은 그러면서... 당신이 꽃과 나무에 대해서 뭘 알고 고집을 하면 말도 안해...전체적인 그림도 없으면서 괜히 이걸 사자, 저걸 사자,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당신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지긋지긋하다..."

"나도 당신이 지긋지긋해..."

"에이, 시팔..."

"나도 시팔이다..."

화가 난 남편은 벌떡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쫓아가 한바탕 더 싸우고 싶은 것을 참았다.

속으로 남편이 죄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부을 동안 내 머리 속에는 끊임없이 낮에 본 살구나무인지 매화나무인지가 떠나지 않았다.

영어로 apricot이니 살구인지 매화인지 정확히 구분이 안되지만 아무튼 그 나무에 핀 꽃을 본 순간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우리가 산 박태기 나무의 분홍색 꽃하고 흰색에 가까운 그 꽃이 같이 어우러져 피어있는 광경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하얀꽃이 핀 살구나무 세 그루, 사이사이 분홍꽃이 핀 박태기 두 그루, 나무 가지 사이에 윙윙거리는 벌, 나무 바로 밑에는 철쭉, 그리고 그 사이로 수선화, 튜울립, 스윗앨리섬, 팬지, 시클라멘트...등이 피어있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뻐끈해질만큼 황홀했다.

내가 항상 마음속에 그리는 봄 풍경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그 나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토양에 맞지 않는 나무인 것을 알았다.

아무리 상상 속의 풍경이 아름다워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포기하려니 마음이 아리고 쓰렸다.

이런 상상을 하고 난 뒤 갑자기 남편이 산 측백나무나 향나무를 닮은 쥬니퍼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사고 싶어할 때 웃으면서 선선히 사는 것에 동의했으면서...

그래서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심통을 부렸다.

살구꽃인지 매화꽃인지 모르지만 내 마음을 앗아간 그 꽃 때문에...

쬐끄만 소리로 혼자 말해본다.

'여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