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키스와 그 후유증>
그 봄날 오후 캠퍼스를 빠져나온 그녀는 아무 버스나 올라타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어깨엔 언제나처럼 걸려 있는 커다란 갈색 가죽 가방 하나. 그 가방의 무게가
무겁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종점이라는 안내양의 말에 눈을 뜨니 삼송리였다.
고등학교 시절 언젠가 가을 소풍 때 왔던 곳.
그녀는 터덜거리며 이 자리까지 그녀를 실어다 준 버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앞을 향해 걸었다. 그제야 어깨에 걸린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가방을 이쪽 어깨에서 다른 쪽 어깨로 바꿔 매는데
누군가 뒤에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무시하고 걷고 있자니
아는 척을 했던 이가 어느 틈엔지 그녀의 곁을 걷고 있었다. 학교 행정실 직원이었다.
그가 물었다.
"이쪽에 사세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그가 말했다.
"그런데 다 저녁에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그녀는 입을 다문 채였고 그는 그녀에게 더는 무슨 말을 시키면 안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걸었고 그는 그녀 곁을 지키며 걸었다.
낡은 벤치가 눈에 띄었을 때 그녀는 다가가 앉았고 그 또한 그녀 곁에 앉았다.
봄날의 저녁 시간은 차츰 한기를 느끼게 했다. 말없이 앉아 있는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키스해 봤어요?"
그러자 그녀 안에서 어떤 용기 같은 게 생겨났다.
"아니오. 아직 안 해 봤어요. 지금 해 보고 싶은데요."
그녀와 그는 길고 오랜 입맞춤을 나누었다. 음 이런 것이었어? 그녀는
그가 키스를 끝낼 때까지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키스를 끝내고
그 어색함을 마무리하기 위해 괜시리 옷매무시를 만지작거리는데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옆자리에 놓아 두었던 그녀의 그 커다란 갈색 가죽 가방이 없었진 것이었다.
이런, 독일어 사전과 교재는 물론 어제 엄마한테서 받은 용돈이 든 지갑도 몽땅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사실 저 오늘 실연 당했거든요.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그 자식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우리 과 그 계집애와 사귀기로 했다고 애들 앞에서
공표한 거 있죠. 키스 고마워요. 집에 가게 차비 좀 빌려 줘요."
그가 지갑을 탈탈 털어 천원 짜리 몇 장을 건넬 때 그녀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주워 삼키기 시작했다.
"사실, 첫 키스의 댓가 치고는 너무 적다는 거 다 아시죠? 키스에도 처녀성이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대학교의 가난한 행정실 직원이고
나는 실연당한 여대생이고 며칠 있으면 독일로 떠날 거니까요. 그뿐인가요?
내 가방과 그 속에 든 것들은 또 어떻구요.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에게는
첫 키스가 아닐지라도 내겐 첫 키스니까요. 그 정도 출혈은 감수하죠 뭐."
그녀는 다음날 내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웃었지만 나는 그녀의 속내를
다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젊은 날이었다.
지금은 딸 하나 키우며 잘 살고 있지만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다 큰 아들 오토바이 사고로 잃었을 적엔
등이 방바닥에 붙어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던
내 살과 같은 친구. 그래도 분위기 띄울 땐 그녀의 이 키스 사건이
단연 최고다.
"실연을 당해 봐야 용기가 생기지."20050224rose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