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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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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만큼 땅만큼 딸을 사랑합니다


BY 황복희 2005-02-23

 
3월부터 새내기 대학생이 되는 딸의 요즘 일과는 연일 바쁩니다. 우선 밤늦게까지 인터넷에 들어가 인터넷 공간으로 끌어들인 친구들과 수다 섞인 채팅을 하느라 부산합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드는 녀석은 정오가 얼추 다 되어야만 비로소 눈을 부비며 일어납니다.
그리곤 또 다시 여기저기 친구들의 부름을 받고는 옷을 꿰 입습니다. "오늘 점심과 저녁도 친구들이 사 주기로 했다"면서 낭창낭창하게 집을 나서는 것입니다. 딸은 이제 오는 3월 2일이면 입학식과 개강이 동시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턴 자신이 기거하게 될 서울에 위치한 대학의 기숙사에 들어갈 날도 불과 닷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제도 딸은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딸이 기숙사에서 덮어야 이불을 새로 사 주고자 딸과 함께 중앙시장의 이불집에 갔습니다. 알록달록 고운 이불과 베개를 사노라니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짠했습니다. 딸은 이불을 고르자마자 친구들을 만난다며 제 곁을 떠났고 하여 혼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정월대보름인지라 다시 또 주변의 시장에 가서 오곡밥의 재료와 나물을 샀습니다. 저녁이 되었음에도 함흥차사인 딸의 핸드폰을 마구 두들겼습니다. 세 번째의 두들김에 겨우 전화를 받은 딸은 노래방에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이라서 오곡밥을 먹는 날이란다, 그러니 어서 들어오렴."
한 시간 안에 귀가하겠다는 딸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 불현듯 다시금 외로움이 밀물처럼 닥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수다쟁이 딸'이 기숙사에 들어가고 나면 우리집은 아마도 인적이 끊겨 적막감이 표표한 절간과도 같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닥친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과부가 아니고 엄연히 남편이 있기는 하지만 평소 술을 안 마시면 마치 입이 무거운 선비와도 같은 위인인 터여서 남편은 한 마디로 '재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군복무중인 아들은 올 가을이 돼야만 제대를 하는 지라 딸에 이어 아들도 없는 빈집이 벌써부터 그렇게 무서운 고독으로 다가옴을 절감했던 것이었습니다. 딸을 기다리며 '이제 딸이 기숙사에 들어갈 때면 무슨 말을 해 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곰곰 생각한 끝에 '금족무래'(今足無來)라는 사자성어를 흰 종이에 썼습니다.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더 나은 미래는 없다'는 의미였지요. 그걸 써서 안방 화장대에 두고 오곡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나물도 삶아서 무치고 있는데 딸이 돌아왔습니다. 시원한 콩나물국도 끓여서 저녁상에 올렸더니 남편과 딸도 아주 맛있다며 잘 먹어주어서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녁상을 물리자마자 딸은 귀가 또 아프다며 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고교의 졸업식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멋이 들어' 귀를 뚫은 딸이었습니다. 근데 귀고리를 부착한 근처에 다시금 염증성 상처가 보이기에 소독을 해 주었습니다. 누워서 이 엄마의 치료(?)를 받던 딸은 이번엔 가렵다며 귀를 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딸의 귀를 파 주면서 말했습니다. "기숙사에서도 귀가 가려우면 누구한테 귀를 파 달라고 할 거야?" 그러자 딸은 벌쭉 웃으면서 "그럼 집에 와서 엄마한테 부탁하면 되죠, 뭐..."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분수가 되어 솟구쳤습니다. "... 엄마, 지금 우세요?" "... 아니다, 울긴..." 겨우 눈물을 제어하곤 아까 써 놓았던 '금족무래'(今足無來) 글씨를 건냈습니다. "이건 너에게 바라는 이 엄마의 바람이란다. 부디 튼실하고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거라!" 그처럼 딸의 앞에서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던 까닭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오래 전에 정리한 장사는 하지만 커다란 빚과 우울증 따위의 상흔을 남겼습니다. 집과 승용차까지도 처분하고 달동네로 이사를 했지만 거듭되는 빈곤의 수렁은 여전히 깊고 암울하기만 했습니다. 급기야 딸은 우리의 빈곤한 현실이 반영되어 학교로부터 학비면제와 급식비 보조 등의 수혜까지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처럼 고단한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딸은 여전히 '전교 일등'의 쾌도난마를 멈추지 않는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더니만 그예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이른바 'SKY 대학'의 정점인 S 대학에 합격하는 기염까지 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딸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제가 건넨 사자성어 종이를 소중히 받아 가방에 챙기는 딸이 다시금 사랑스러워서 저는 딸을 쫓아가 가슴에 꼭 안았습니다. 그리곤 사정없이 키스세례를 퍼 부었습니다. "서울은 눈 뜨고도 코 베 가는 곳이라고 했으니 공부도 좋지만 부디 매사에 조심하고 건강에 유념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던 딸도 제게 키스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뭐 한 두 살 먹은 어린애인가요..." 크게 배우는 곳이 바로 '대학'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딸이 서울에까지 진출하여 뭘, 어디서부터 다시 배워야할지 현재로선 약간의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그리해 왔던 것처럼 매사에 성실하고 예의를 지키며 면학에 정진하는 것 외에도 선배님들께 조언을 구하는 따위로서 배워나가면 될 듯 싶기는 합니다. 딸의 말에 저는 이내 밝은 표정으로 바꾸며 당부했습니다. "대학생이라는 건 젊은이의 특권이란다, 그러니 공부도 잘 해야 하겠지만 병행하여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고 외국에도 나가 견문을 넓히거라..."  딸이 고등학교를 다녔던 작년까지 3년 동안 저는 이 땅의 모든 수험생 학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그야말로 노심초사의 연속이었음은 물론입니다. 밤마다 딸의 마중을 나가는 것은 '기본 옵션'이었으며 폭염이 내리쬐는 한여름 휴가 때도 피서는 커녕 가까운 물가에조차 가지 못 했습니다. 그건 바로 대입을 앞둔 딸의 수발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의 성원에 부응하고자 딸 역시도 줄곧 면학에 정진하여 좋은 성적을 일궈낼 수 있었으니 그렇다면 그같은 결과물은 저와 딸의 의기투합이 어우러진 생성물일 터이겠지요. 딸은 벌써부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피력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오는 여름방학 즈음엔 아르바이트를 하여 모은 돈으로 일본으로 배낭여행을 떠나고 싶답니다. 내년엔 미국으로 유학도 가고 싶다고 하네요. 저는 여지껏 외국은 커녕 제주도에도 가 보지 못 한 무지렁이로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물 안 개구리'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딸의 바람은 모두 이뤄지길 바랍니다. 일본과 미국 외에도 오지 여행가 한비야 님처럼 세계 각국을 돌면서 문물을 배우고 식견을 넓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딸은 이제 곧 기숙사에 입사(入舍)를 하여 입학을 하고 개강까지 하게 되면 서울의 대학 기숙사에서 먹고 자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이곳 집에서 응석을 부리던 살가운 딸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딸은 저로 하여금 딸을 키우는 새록새록한 재미와 함께 이 풍진 세상을 부지런히 살게 한 모티브였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딸과의 이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이별 연습을 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별의 순간은 누구라도 서글픕니다. 하지만 짧은 이별 뒤의 해후는 커다란 반가움의 해일로서 다가오리라 함을 믿으며 묵묵히 이별 연습을 하고자 합니다. 딸과의 이별 연습의 하나로서 우선 딸과 함께 술도 한 잔 하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가고 싶습니다. 끝으로 딸이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반드시 미래사회에 촛불이 되고 소금이 되는 인재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딸을 사랑합니다! 하늘만큼 땅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