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일학년 때다.
미션스쿨이어서 찬송가 합창 경연대회가 있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나랑 친하던 희순이가 지휘를 맡았는데 날더러는 입만 벙긋거리고 소리를 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모두들 입을 모아 고운 소리로 노래를 하였다.
"야, 이영희!"
열심히 지휘를 하던 희순이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너는 소리내지 말라고 했잖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던가 보다.
그 후로도 희순이는 몇 번인가 나를 지적했다.
조그만 소리로 따라 하는데도 귀신같이 내 목소리를 알아내곤 하였다.
희순이의 지휘로 열심히 연습한 우리반은 성가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했다.
대회 때, 내가 소리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지휘자의 지시대로 입만 벙긋거린 덕이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있었다.
'두마안강 푸른 무울에 노젓는 배엣싸아공~
......'
담임선생의 지정 유행곡이었고 나를 제외한 아이들 모두가 따라 부를 줄 아는 노래였다.
뒤늦게 나도 그 노래를 배우고 싶었다.
짝궁에게 그 때 유행이던 군것질거리 라면땅 한 봉지를 사주고 부탁했다.
"연임아, 나 그 노래 좀 가르쳐 줘..."
수업료는 라면땅 한 봉지였지만 연임이는 정말로 열성을 다해 나를 가르쳤다.
교련실기대회 연습을 위해 종합경기장에 가는 길에, 오는 길에, 열심히 '두마안강~~...'을 소리 높여 연습했다.
같이 가던 아이들도 덩달아 '두마안강~~...'을 부르며 다녔다.
쉬는 시간에도 틈틈히 '두마안강~~...'을 불렀다.
연임이는 가르치는 일에, 나는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연임이가 말했다.
"영희야, 내가 라면땅 한 봉지 도로 사 줄께..."
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덕진 왕릉으로 소풍을 갔다.
오랫만에 교실을 벗어 난 아이들은 즐거워하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락시간이 되어 저마다 숨은 장기들을 자랑하며 신이 났다.
저희들끼리 신나게 놀더니 담임인 나를 찾았다.
노래를 한 곡 하란다.
희순이 생각도 나고, 연임이 생각도 나서,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흥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김상희가 부른 '울산 큰애기' 정도면 잘 해 낼 것도 같았다.
그런 정도의 쉬운 노래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지만 폼잡고 연습한 적도 많았던 노래인지라, 어쩌면 뜻밖에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기대와 두려움에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 섰다.
아, 참, 그 시절 난 정말 인기있는 교사였다.
나를 좋아하는 남학생들 때문에 교무실에서는 선생들 사이에 놀림거리가 될 정도였으니까...
아이들은 초롱초롱 빛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미소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감정을 넣어, 열성을 다해, 눈을 지긋이 감고 몸도 흔들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애기
......'
내 귀에는 김상희가 부르는 노래보다 더 멋있게 들렸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했던 노래인데...'
기분이 좋아져서 선생들이 모여 노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쭈빗거리며 다가왔다.
우리 반에서 꼴찌를 맡아 놓고 하던 아이였다.
성적표를 받아들 때마다 몹시도 실망하여 위로를 건네지 않을 수 없던 아이다.
"얘, 규태야, 너무 실망하지 마라. 62명 있으면 62등도 있는게지. 네가 공부는 62등이지만 잘 하는 것도 많잖아."
나는 이렇게 그 아이를 위로하곤 했었다.
그 녀석이 멈칫거리며 다가오더니 금방 기어들 것 같은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요오.... 선생님, 아까 그거어...노래예요? 책 읽은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