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가을이 되었구나!
아침마다 네동생 데려다주는 길에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흙길과 너무나 잘 어울리더라. 그 덕에 네 동생과 나는 날마다 그 시간에 하는 똑 같은 말이 있단다.
와! 코스모스다 이쁘다 크치? “엄마 하나만 따면 안되까 우리 선생님 주게”
웬만한 밭뙈기 만한 두둑에 핀 코스모스는 멀리서 보아도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다.
투명하고 높아진 하늘이랑, 상쾌한 바람이 함께 어울려 만들어진 가을이라는 작품.
어쩌면 가을하늘과 가장 잘 어울리는 코스모스가 다 지기 전에 너희들이랑 여행을 한번 갔으면 하는 소망이 몇 년째 무산되고 있구나. 잘 지내니?
너를 생각하면 목구멍이 따끔거리게 아파 오는 이유.
생각이 너한테 머물면 괜스레 걱정스럽고, 잘 있노란 말 들을 때까지 불안했었다는 말이 너를 얼마나 아프게 할지....... 그런데도 나는 지금 한다.
너에게 좀더 솔직하고 진실하게 다가가는 길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고 나니 마음이 참 싸하다. 겨울바다처럼.
아들아!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 많은 짐들을 지마고 선뜻 나섰을까?
겁도 없이 달려든 녹록치 않은 새엄마자리. 내속으로 낳은 자식도 키우기 힘들다는 세상에 그것도 둘씩이나 딸린 사람한테로 무작정 덤벼든, 그래서 아팠던 마음들은 이제 굳은살이 박혀 감각마저 둔해지게 한 너희 만나 산 8년.
한때는 내게 참 한심한 걱정하나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하면, 눈물이 메말라 정말로 울고 싶을 때 눈물이 안나오면 어떻하냐는거,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할 땐 눈물이라도 펑펑 솓아 내버려야 속이 시원할 텐데 눈에 아무리 힘주어 쥐어짜도 눈물은 나오지 않고 목젖 있는데만 쥐내림 같은 통증이 느껴지고 한숨만 나올 때.
이 세상에 두고두고 내가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 엄마 세상 싫다 가실 때도 눈물이 안나오면 어떻할까 하는 거, 억지로라도 울어야 할지, 우는 척 해야할지 아님 그냥 덤덤하게 있어야 할지, 우는 언니, 동생들 따라 아이고 아이고 곡만 해야하나........
하다하다 걱정까지 가불한 나를 이해하기에 아직은 내 아들이 어리지 싶다.
생각해보면 참 힘든 날들이었다.
힘든 엄마자리 만큼이나 녹록찮은 가난. 우리 정말로 힘들었다 그치?
힘든단 말도 인이 박혀 힘이 드는 건지 어쩐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무감할 만큼.
빈손 되어 시골로 내려와 험한 일 수없이 겪고, 대책없는일 여러 번 치르고, 마음 상했던 거 차라리 수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억장 무너지게 힘이 들고 괴로웠던 일이 뭔지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만약에 우리가 타인이었으면 전부다 기억났을지도 모르겠다.
아들아
나는 일찍부터 내인생을 포기해버린 사람 마냥 내 것에 욕심이 없었던 것 같다.
내 몫을 챙기는데 인색하고, 내껄로 만드는데 소극적인 내가 너희들 사람이 되려고는 참 많이 애쓰며 욕심을 부렸지.
나는 내가 잘살 수 있을 거라, 아니 잘살아야 한다는 어줍잖은 오기와 꿋꿋한 척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내 희망사항일 뿐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을 저질러 버린, 그러니까 네 동생이 태어나 아장아장 걷고 있을 때더라.
그 아이가 지금 아침마다 내게 가을풍경을 구경시켜 주고, 토요일이면 학교간 너를 마치 여행이라도 간 듯 선물함께 기다리고, 무시로 널 핸드폰해서 감독하고, 귀찮아하는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응석부리고, 우리 집 대장노릇 다 해먹는 일곱 살인 막내잖니?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되면. 아마 내 모습도 많이 변해 있지 않을까?
특히 너와의 관계..... 우리관계. 다시 마음이 아파지려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둘째보다 모든거 다 아는 너를 보기가 힘이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니 마음은 나보다 더 고되고 아팠으리라. 착하고 여린 니 성품에 대놓고 반항도 못하고, 그래서 방황하던 널 모질게 매질하던 아빠가 얼마나 야속하고 미웠니?
방관만 하다 때로는 같이 매질도 한 나는 또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을까?
“엄마 나좀 살려주세요 엄마 엄마” 하며 울던 너를 외면하면서 나는 너에게 어쩔 없는 새엄마밖에 될 수 없다는걸 깨닫곤 했단다.
그 상황에서 내가 나서면 아빠는 보란 듯이 너를 더 심하게 때리곤 하셨거든.
세상에 탈탈 털어 하나밖에 없는 내아들이란 노래를 부르던 아빠도 너를 때리면서 마음이 좋진 않았겠지만 너에겐 몽둥이로, 나에겐 원망으로 같이 때리더라.
나의 어줍잖은 오해였으면 좋겠다.
저 사람이 내가 친 엄마였어도 저럴까. 말리는 내모습이 가식으로 느껴져서 그런 걸까?
이런 마음들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건지 아빠는 모르는 사람 같아 나는 나대로 속상해 하다보면 너에게서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내가 보이는 거야.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빠와의 다툼도 늘었고 가끔은 아주 큰 쌈도 했지.
나도 사람이잖니? 나도 지칠줄아는 여자잖니? 나도 처음부터 너로 인해 속상하진 않았어 그런 일들이 생기기전에는 적어도 별 욕심 없이, 거짓없이, 가식같은거 없이, 둘째한테 하는 것처럼 하리란 그래서 둘째한테처럼 네게도 괜찮은 엄마가 되고 싶었었어.
아! 둘째한테처럼 편하게만 너를 대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다.
하지만 너희한테 새엄마라는 거 부정 안 하는데 계모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
계모라면 괜한 선입견이 콩쥐팥쥐, 장화홍련, 신데렐라 그런 엄마 연상되잖니?
난 가끔 아빠가 계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때가 있었는데, 내 눈에 그렇게 보인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너에게 정말로 화나고 속이 상한, 나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위신이 설 것 같은, 나에게 보란 듯이, 그 복잡다양한 아빠의 아픔이 술만으로 달래지진 않으셨을 거야 그치?
내 잘못들과 사실을 인정하고 시인하는데 8년이란 시간이 걸렸구나.
속이 시원하다는 말 지금 하라고 생긴 말인가 보다. 좀더 일찍 솔직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해본다.
이제라도 너를 편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누구한테라도 내 아들입니다. 라고 쭈뼛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좋다.
토요일이면 막내 못잖게 널 기다리는 마음이 생겨서 행복하고, 일요일이면 빨리 가려고만 하는 니가 서운해 지는 것도 좋다.
엄마 나 왔어! 라고 들어서는 너의 굵은 목소리에 난 또 어떤 영감인줄 알았네 라고 말하는 내게 아들한테 영감이 뭐야 하는 니가 좋다.
밥먹어라 하면 “응” 만하던 니가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먹기 싫어 밥맛없어 라고도 하는 니가 좋다. 일주일치 빨랫감에서 언젠가부터 속옷이 없는 게 서운해지는 내가 좋다.
엄마 교복 다려줘 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니가 좋고, 오빠 오면 밥상이 풀밭 아니다며 눈흘기는 둘째가 밉지 않아 좋다.
축제때 무대에서 노래도 불렀다는 말에 밝은 모습으로 변해가는게 느껴져서 좋다.
오늘 오자 마자 내 눈앞에 손을 들이밀며 환하게 웃던, 어릴 때 입으로 너무 물어뜯어 길지 않던 뭉텅한 손톱 볼때마다 언짢았는데 손톱이 길고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이러다 공부까지 잘해 달란 욕심 생길라 염려된다. 서툴러서 엄마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지금까지는 과도기였다 치자.
이제는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은 건 노하우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아들아
내가 진작에 너를 허물없이 사랑했으면 아빠 하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잘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치? 막내 엄지손톱 만하던 광어가 이제 아빠 팔목도 더 지나게 컸단다. 듣기만 해도 좋지 않니?
그리고 내년 가을에는 몇 년째 벼르기만 한 가족여행 꼭 가도록 하자.
아직 한번도 못가본 외갓집과 다섯 명이나 되는 이모네집까지 다 가려면 한 달은 다녀야 되겠다.
가을달이 차지만은 않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다. 가을에 달을 보면서 행복해 본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 하다. 참 따뜻하고 예뻐 보이네.
내일이면 빨리 가마고 설칠 테니 잊기 전에 네 가방에다 편지를 담아둬야겠다.
좀 서운한 대목이 있더라도 엄마 마음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 알아주는 가슴이 넓은 남자가 되어주었으면 싶다. 잘생긴 얼굴에 가슴까지 넓으면 얼마나 멋진 남자가 되겠니?
건강해야 돼. 넌 오래오래 우리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했잖니? 하고픈 말이 이리도 많은걸 그동안 참느라 나 애썼지? 아빠한테보다 너한테 많이 의지하는 나를 불쌍히 봐서라도 건강하고 씩씩해줘라.
그리고........용서해.
사랑해.
2003년 10월11일 토요일
잠든 아들 얼굴 바라보면서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