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온세상에 하얀눈이 나풀거리기 시작한다.
이상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눈만 나리면 마음이 설레이는 건 변함이 없다.
깔깔거리며 추운 줄도 모르고 친구와 팔짱을 끼고
무등산자락을 걸어서 넘어 갔던 철부지 시절이 새삼 그립다.
지금같으면 그 먼거리를 추워서도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으리라...
그러고보니 지척에 살면서도 그녀와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시집 가면 서로 옆집에 살자던 어릴 적 약속도 어느샌가 묻혀 버리고
그녀와 나는 특별히 날을 잡아야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몸이 바쁜 건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건지...
이런저런 생각에 컴 앞에 앉아 메일을 보내고 글을 쓰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웬일이야...'
'얘! 나 점심 좀 사주라~!'
동료들과 먹지 않고 나랑 점심을 먹고 싶다고...
이건 분명 그녀 또한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다는 징후이다.
외롭다거나 심란하다거나 슬프다거나...
'알았어. 뭐 먹고 싶은데??'
'요즘 입맛이 없는데 동지 팥죽이나 먹을까??'
뭐? 입맛이 없다구??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나 나나 워낙에 식성이 좋아서
사시사철 아무리 아파도 입맛없단 소리는 안하는 체질인데 입맛이 없다니...
다이어트 중이란다.
하기야 넌 한 이십킬로는 감량해야 하는데...
늘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그녀였기에 이번엔 얼마나 가려나 걱정부터 앞서네...
정말 입맛이 없나보다.
다이어트를 위해 약을 먹는다더니 아마도 식욕억제제를 먹었나 보다.
그녀는 늘 내가 절반쯤 먹을 즈음이면 식사가 이미 끝난 상태였는데
오늘은 남기기조차 한다.
'너,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은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그렇지...'
스트레스라...
네 안에 일어나고 있는 그 정체모를 마음 속 전쟁을 어렴풋이 짐작할 것도 같다마는...
'얘! 우리 부산이나 가자, 요번 주말에.'
뜬금없는 그녀의 제안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다 본다.
'부산?'
'응, 희경이 잘 있대?'
'그렇게 궁금함 네가 한 번 전화 해 보지 그러니?
그녀는 꼭 네 안부 묻던데 너도 전화 좀 해 봐 .'
'너 주말에 스케쥴 비워. 그리고 네 남편한테 꼭 허락 받아라~'
늘 내가 말썽이군.
허락을 받으라구?
흠...글쎄다...
중학교때 셋이서 몰려 다녔던 친구 희경이를 다른 친구가 겨우겨우 수소문하여
부산 해운대에서 대형 미용실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전화를 했었다.
숨 넘어가는 경상도 사투리로 그녀는 연신 내 이름과 환호성을 번갈아 부르짖었다.
'엄머 엄머 엄머 이 지지배야~'
보고싶어 죽겠다고 작년 여름부터 꼭 오라고 성화였는데...
내 스케줄 때문에 그녀에게 가지 못하고 결국 해를 넘기고 말았다.
그녀의 거처를 찾아 낸 친구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는 말에 전화를 했더니
방방 뜬 목소리로 '이번 주에 가자!!'며 성화이다.
이미 마음은 부산 해운대 앞바다에 달맞이고개에 보내 버린 모양이다.
'기왕이면 멋진 남자도 좀 준비해두라고 해라~'
셋이서 부산으로 날라가 볼까...
얼마만인가...
그녀를 만난지가...
직장에서 시달리고 마음은 공허해진 그녀가 함께 동행하잔다.
그래.
나이 들수록 친구를 찾는다 하더라.
이 기회에 정말 훌쩍 떠나가 볼까?
하루쯤 모든 것 젖혀두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볼까...
설레이는 마음은 이미 셋이서 고개 맞대고 앉아 히히덕거리며 수다를 풀고 있다.
부산에 도착하면 넷이서 폴짝폴짝 얼싸안고 뛰고 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