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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력을 내리면서...(2)


BY 개망초꽃 2005-01-07

7월엔 조금 지쳐 있었다. 경기침체로 매출도 지치고 그러다보니 장사할 마음도 지쳐 있었다.
아이들하고만 연락을 하던 남편이 이른 코스모스가 피던 비 오던 7월...
헤어진지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지쳐 있다보니 책임감 없는 말로 들릴지 몰라도 아무 뜻 없이 남편을 만났다.
속 들여다보이는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아이들 학비를 대 준다는 말에 까짓 거 만나면
어떠냐는 식이었다. 헤어지던 날도 때 이른 코스모스를 버스 안에서 보았었다.
코스모스도 성급하게 피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타고 내리는데,
나만 홀로 비틀거리는 버스를 탄 것 같은 그런 허무함.
남편을 만났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이 안정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걸로 만족했다.
통장으로 몇 십 만원을 넣어 준다고 해서 편한대로 하라고 했다.
7월달 달력엔 당개지치라는 꽃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피어 있었다.
지치고 지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고 살면 못 살 것도 없다.
한 푼도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몇 십 만원이면 커다란 공돈이었고 대단한 이득이었다.

폭염이 비처럼 내리던 8월이었다. 매출은 30%이상 떨어지고,
매장 앞 작은 화단엔 물봉선화 꽃과 달개비 꽃이 엉켜 그 더위에 잘 살아가고 있었다.
산에는 국수나무 꽃이 하얗다. 달력에도 국수나무 줄기에 꽃이 빈틈없이  피어있다.
살을 찢는 얼음 속에서도 온 몸이 날아다니는 비바람 속에서도
머리가 벗겨질 듯한 폭염 속에서도
꽃은 피고 꽃은 진다. 매출은 떨어지고 기온은 올라가도 야생화는 피어 당차다.
나무는 초록 잎에 싸여 행복하였다.

들국화의 계절 가을이 왔다. 화원에서 보라색 애기쑥부쟁이 화분을 네 개 사왔다.
두 개는 플라타너스 나무 밑 둥에 놓고
두 개는 낡은 탁자에 올려놓고 차를 마실 때 쑥부쟁이 꽃과 마주보며 마셨다.
작고 적은 것에 감사했다.
가을과 들국화와 일할 수 있는 여건과 나를 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 감사했다.
9월달 달력엔 샛노란 들국화가 피어,
가을입니다. 우리의 계절 가을이라구요? 소리쳐 알려 주었다.

딸아이와 대학 수시 면접을 보러가던 날은
나뭇잎에 붉고 노란 색동 옷을 입던 화창한 날이었다.
운 좋게 담임선생님이 딸아이가 원하는 과에 면접을 볼 수 있게끔 신경을 많이 써 주셨다.
딸아이가 잘하던 과목만으로 수시를 넣고 면접을 보러 가면서 우린 가을 색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딸아이는 합격이 되었다.
수능시험을 안 봐도 되었고 무엇보다 돈 안 들이고 대학을 갔다.
한 가지 큰 고민과 힘듬을 덜어주어서 혼자되어 처음으로 자식이 대견하고 홀가분했다.
나는 자식이 짐스럽다. 일어나도 누워도 두 어깨가 무거웠다.
일년 중 제일 기뻤던 달, 산꿩의 다리 꽃이 피는 달,10월이었다.

딸아이가 수능시험을 보는 줄 알고 찹쌀떡을 사가지고 늦 가을날 고운 손님이 날 찾아왔다.
그날은 유달리 추었다. 그리고 그날은 유달리 손님이 많던 호박고구마 세일치던 날이었다.
세련된 손님이 나를 빤히 보더니 인사를 했다.
우린 그렇게 해물비빔밥을 비벼 놓고 술 한 잔을 부딪혔다.
좋은 사람 만나세요 했던가? 몇 달 안 되었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 때문인가? 추위 속에서도 야생화는 피어난다.
설악산가면 의례적으로 사오던 기념품 꽃, 솜다리 꽃이 11월 달력에 찍혀져 있었다.
융 같다. 중학교 다닐 때 가정시간에 쓰던 융, 이것과 똑같았다. 솜다리꽃잎이...
저만치서 겨울이 오고 있었다.

계산대 뒤에 있던 냉동실을 치우고 그 자리에 탁자를 놓았다.
손님 맞이 하기가 한결 편하고 편리해졌다.
탁자위엔 2년 동안 키웠던 이끼낀 제주도 돌멩이를 올려놓았다.
이끼는 때맞춰 꽃을 피웠다. 친해진 손님이 오시면 차 한 잔을 드리고 이끼를 보여 주었다.
이끼는 썰렁하고 쓸쓸한 겨울 매장을 파릇파릇하게 돋아나게 해 주었다.
낯선 사람과도 대화의 줄기를 흘러가게 만들어 주었다.
이끼를 앞에 두고 책도 보고 일 도와주는 분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한다.
냉동실만 치우고 구석에 있던 탁자를 옮겼을 뿐인데 겨울 하루가 새롭다.
이끼의 숨소리가 매장 안에 조촐하게 감돌았다.
12월이 단숨에 지나가고 더 이상 넘길 달력이 없는 마지막 달엔 처녀치마 꽃이
자신의 치마를 펼치며 주변의 눈을 녹이고 있었다.
자연은 풀씨 하나도 야생화 한 송이도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싶게 대견하다.

일년의 시간이 흘렀다. 헤어질 인연들과는 헤어지고 만날 인연들과는 만났다.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싫증 났기 때문에 혹은 자기 의지로
또 혹은 상대방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엄마가 준 야생화 달력은 내려지고, 그 곳에 거래처에서 준 풀꽃 달력을 걸었다.
지난해는 야생화처럼 거친 바람에 넘어질 듯 하면서 다시 일어났고
싸늘한 기온에 주저 앉기도 했지만 좁고 거친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얼음장을 뚫고 밝은 보라색 노루귀 꽃이 첫달을 열었듯이...
눈을 녹여가며 연한 보라색 처녀치마꽃으로 마감을 했듯이...

올해도 풀꽃을 닮아 시멘트 틈에서, 버스길 가장자리에서 질기게 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