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쯤 어느 봄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가을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가나부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가끔 그 때 일이 떠오르면 나는 거울 앞으로 가서 내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다.
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어서...
거울 속에 보이는 나는 우선 아무리 잘 봐 주어도 큰 키는 아니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키순으로 복도에 한줄로 세워놓고 번호를 정할 때 내 번호는 62명 중 23번이었으니 작은 키에 속한다.
몸무게라도 많으냐 그것도 아니다.
난 살이 쪄도 표가 안나는 사람이다.
실제보다 5~6킬로는 친구들이 적게 봐주었으니까...
그런데 실제 몸무게가 간신히 평균치에 도달한 나는 아무리 봐도 연약해 보인다.
얼굴도 그렇다
눈도, 코도, 입도, 큰 것은 하나도 없다.
혈색이라도 좋으냐, 그것도 아니다.
'어디 아프냐?'소리는 내가 가끔 들었던 말이다.
대학교 2학년 봄 소풍이 끝났을 때 과대표하던 남학생이 내게 택시를 타고 가라고 돈을 내밀었다.
"여학생들은 택시비도 주나요?"
내 물음에 그는 대답했었다.
"아니요, ns씨가 나와 준 것이 너무도 고마워서..."
여러 행사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해 참여하지 않았던 나를 그는 몸이 약해서라고 지레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어디를 보아도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 첫인상은 여리고 약한 것이라고 한다.
눈빛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평소 내 눈을 잠오는 눈이라고 놀리던 친구가 있었으니 그도 별로 신빙성이 없는 소리다.
일요일 저녁 나는 서둘러 사촌 언니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사촌 언니 집에서 조카들 공부를 도와주며 숙식을 하고 있었다.
사촌언니 집은 내가 다니던 학교 뒤쪽에 있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린 나는 텅 빈 학교 교정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중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캠퍼스를 가졌다고 하였다.
그 넓은 캠퍼스에 일요일 저녁이어서인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긴 건지산 자락에 위치한 그 학교는 그다지 사람이 지나 다닐 일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스름 땅거미에 쫒기듯 열심히 발길을 재촉하던 내 앞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손잡이가 둥글게 휘어진 기다란 우산을 든 사십대 초반 쯤 되어보이는 남자였다.
"학생, 이 학교 다니나?"
내 손에 들려진 책 몇 권으로 그는 어렵지 않게 내가 학생임을 알았을 것이다.
"네. 그런데요."
"무슨 대지?"
"문리대인데요.'
"아, 그래? 나도 문리대 졸업했는데..."
나는 동창 같은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다.
그 남자가 문리대 졸업생이건 아니건 내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별 실없는 놈이 다 있네' 하였지만 그래도 선후배가 깍듯한 문화 속에 살던 나는 겉으로는 공손했다.
"아, 그러세요."
그 남자는 그 다음 별 할 말이 없어 보였다.
가던 길을 가기 위해 그 남자를 뒤로 하고 내가 몇 발짝을 떼었을 때다.
그 남자가 들고 있던 기다란 우산의 동그란 손잡이로 내 목을 걸어 잡아 당긴 것은...
우선 숨이 막힌 나는 우산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돌아섰다.
순간 내 안에서 피어오른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파랗게 독이 오른 눈으로 그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야, 이 새끼!"
조폭 똘만이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흘러 나갔다.
그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내가 보기와 달리 태권도 유단자라도 되나보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 아가씨..., 아무 것도 아니니 그냥 가시요."
조금 전 반말을 하던 그 남자의 말은 어느새 경어로 바뀌어 있었다.
"뭐야? 내가 니가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못하게 하면 못가는 사람이냐?"
나는 전생에 조폭 두목이었는지도 모른다.
똘만이였다면 혼자서 그리 대담하지는 못했을테니까...
여차하면 싸울 생각이었는지 어느새 내 두 손은 허리에 걸쳐 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운동하는 사촌 오빠에게서 배운 두 손을 번갈아 앞으로 내 뻗는 동작이 고작이었는데...
그 남자 그래도 겁을 먹은 것은 분명했다.
이번에는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다시 한번 그 남자를 째려주고 마치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라도 하는 양 돌아서며 씹어 뱄듯이 말했다.
"별, 미친 새끼를 다 보네."
혼자 길을 가다 변을 당했다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뉴스거리가 될 때 나는 가슴을 쓸어 내린다.
참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는데...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는데...
내 안에 그런 힘이 있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딸년을 저리 키워 어찌 할 것이냐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날 기를 살려 키워 준 울 부모에게 감사하기도 한다.
하긴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을 문다고 하는데...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