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편은 마음이 좀 불편했다.
아무래도 월부 책장수의 수단에 넘어가 거금을 쓴 것 같아서...
아이를 두고 일하러 가야 하는 여편은 아이의 지능 개발을 위해서라면 그 보다 더한 것이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긴 했지만...
문제는 그 책과 테잎이 얼마나 아이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상의하지 않고 산 것도 마음에 걸렸다.
"당장 그 책하고 테잎, 도로 물러!"
남편은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여편은 눈에 힘을 주어 가늘게 뜨고 남편을 바라 보며, 꼭 다문 입에도 힘을 주었다.
그리고 화가 나서 거칠어지는 숨결을 고르게 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숨을 고른 다음 천천히, 되도록 또박또박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번 돈으로 내 아들 사 준 거예요.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당신이 술 값으로 한 달 월급을 다 쓰고 온 날도 내가 화 내던가요?"
여편은 평소 잔 소리 대신 남편의 비행을 머리 한 켠에 꼬박꼬박 저축해 두었다가 이럴 때 꺼내서 남편의 입을 막는다.
이렇게 까지 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무조건 소리부터 지르는 남편에게 화가 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들은 돌이 되기 전에 스물 네 권의 책과 테잎을 갖게 되었다.
틈만 나면 아들에게 테잎을 들려 주던 여편은 아이가 좀 자라게 되자 카세트 켜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쳤다.
두 돌이 조금 지나서 부터 아이는 혼자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였을까?
아이는 말도 빠르고 사용하는 단어도 또래에 비해 풍부했다.
어른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말도 곧잘 하였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시골 할머니 집에 갔을 때다.
오 십 대 중반에 들어 선 할머니가 거울하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흰 머리를 뽑기 위해서...
처음 보는 광경에 아이는 의아했던 모양이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뭘 하세요?"
흰 머리 뽑기에 바쁜 할머니는 돌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흰 머리 뽑는다."
아이가 또 느릿하게 물었다.
"그런데 흰 머리는 왜 뽑아요?"
할머니는 여전히 흰 머리 뽑기에 열중한 채 대답했다.
"젊어 보이려고 뽑는다."
아이는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제 엄마가 평소에 아이를 타이를 때 쓰는 느릿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타이르듯 말했다.
"할머니, 생긴 대로 그냥 사세요."
할머니는 비로소 거울에서 눈을 떼고 아이를 바라 보았다.
아이는 그 할머니를 안타깝다는 듯이, 아니면 안 되었다는 듯이 바라보며 한 마디 덧 붙였다.
"할머니가 아무리 젊게 보여도 제가 할머니를 아줌마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
할머니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고민입니다.
그 아이를 아들로 둔 이 엄마의 머리가 자꾸 희끗희끗해지는데 염색을 해야 되는 지, 말아야 되는 지...
아들 녀석이 느릿한 목소리로 엄마를 타이를 것만 같은데...
"엄마, 생긴 대로 그냥 사세요..."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