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은 며칠동안은 멍하니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리고 다시 며칠,남자와 헤어져야 겠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 지냈다.
안되겠다 싶었다.
싫다는 여자를 끌어내 함께 정리를 해 보자고 달랬다.
잠시 머뭇거리던 여자의 손가락이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판을 두드리며 울기와 쓰기를 반복했다.
사람의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줄 몰랐다.
누구나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겉과 속을 살펴볼 기회를 가져 봄직도 하겠구나 생각했다.
설령 그것이 아픔이더라도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알아야 의무인것처럼...
그것들을 살피며 나는 또 다시 사랑이이라는 최면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지 생각했다.
내 고유한 영역을 지킬것이며 태어난대로 살것이며 그것이 타의에 의해 결정
되어지는일은 없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막힌 구멍은 언젠가는 역루한다는것...
십오년을 넘도록 한 남자와 살며 내 자신이 이토록 겸허해졌던 순간은 없었다.
자신을 드러낸다는건 모든걸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 모든걸 받아들일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살아가고 싶은것이다.
나의 미련함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사물의 단면만을 보아 왔다는건 앞만 보고 달렸다는 증거이다.
나에게 최선만을 다했노라 믿어 왔던 남편 역시 나를 용서할수 없다며 억장이 무너진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억장의 무너짐은 단 한번 뿐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무너진 내 억장에 비할바 아니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익숙치 않은 변화는 나로 인한 단 한번 일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통탄할 일이다.
어찌보면 남자란 나약함을 가장한 어린 아이의 철없는 심성과 해결할 방도를
투정으로만 일관하는 속수무책의 타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세계일뿐,여자가 이해해야할 건 그들의 세계가 아니라 여자 자신이어야한다.
내게 친구가 있어 한 친구는 동반자적 삶에 대한 재평가로 생각하라 했다 .
또 한 친구는 자신의 아픔까지도 거리낌없이 보여 주며 대게의 여자들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여자의 허영은 남자의 그것과 달라 자신을 감추려든다.
감추려 들다니....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감추어야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여자들,그 수많은
여자들의 최면을 다 풀어내 버린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아니,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행복하다면 그 최면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에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다분히 노력한 댓가를 누려야 하는 것 일 뿐,내가 걱정하는건 단지 누군가에겐가 행복해 보이기
위해 허영을 부리는 따위이다.
그러니 내가 분명 행복했다 하는 순간은 그 순간이었을뿐, 이제 그것의 양변을 모두 바로 보겠다하니 여자도 남자도 억장이 무너질수 밖에 없는것이다.
탄탄한 실타래처럼 경직된 마음에서 풀려나온 마음들이 조금씩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해결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만큼 저만치 앞서갔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속에 남아있던 희망이 날개를 치며 멀리 달아나듯,
어느새 나는 그 희망을 쫒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있던 희망.
희망은 고난과 비통에 젖어 있다가도 새로움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불꽃같은 힘이다.
희망은 내게 불꽃같은 기운이 되어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
꺼질듯 약해지던 불꽃,그것으로 나는 그동안의 묵은 비애를 모두 태워버릴 수 있었다.
재조차 남기기 싫은듯 불꽃은 잠시 요란하게 타 올랐지만 다시 잠잠해 지기 시작했다.
흔적들마저 멀리 바람에 날려보내고 나는 빈 가슴에 작은 불씨 하나 다시 담아둔다.
그리고 언제고 다시 활활 타올라도 좋을....
나는 그러한 불꽃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