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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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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아이)아이의 길을 축복하며


BY 파초 2004-11-25

며칠전에 이메일로 남편이 아이들의 어릴때 사진을 스캔해서 보내왔다.

두 형제가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인데 사진 아래에 끝맺음을 하지

못한 남편의 두어 줄의 글씨에 가슴이 아파서 이내 메일을 덮어 버렸다.

 

'아 시진을 보니 행복했던 시절이 그립다. 그 때처럼 큰 아이가 다시 우리들의

희망이 되었으면......".

 

남편은 이 사진을 큰 아이가 인기 있는 일본 만화의 주인공으로 배경 화면 넣은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라고  거듭 당부를 했다. 남편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큰 아이한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니 웃기만 한다.

그러나 이 모습도 지난 몇달을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누구나 다 자기 자식이 귀하고 자랑스럽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첫아이 또한 조그마한 산골에서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 내리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너무 안 먹어서 돌봐주는 아줌마가 7년동안 밥그릇 들고 따라 다녀서 유명했고

무엇보다도 돌전에 어른들과 대화가 될 정도로 언어쪽으로 발달이 빨랐다.

그리고 노래를 잘 하여 종종 산골 행사에 무대에 서는 일도 잦고 우리들이 공인된

사람들이어서 자동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입장에 있어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귀에 들려 오는 일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노래와 춤과 그리고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아이를 보고 만나는 사람마다

산골을 떠나서 아이의 재능을 키워 주라고 했건만 여건상 그렇게 하지 못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도시의 공연장을 찾아서 문화의 벽을 허물어 주고자 노력했다.

 

남자스런 외모보다 다소 여성스러운 곱상함을 가진 외모를 가진 채 사춘기를 맞았다.

공부보다는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였기에 음악의 길을 조용히

권했다. 처음에는 아이도 동의를 나타내 중학생임에도 공부보다는 피아노에 더

열심을 쏟았다.

 

십오년을 열평 남짓한 사택에서 살아온 터라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공간 하나 주지

못한 것이 항상 가슴에 맺혀 있어 올해 무리하여 사택을 벗어나 산골에서는 제법

평수가 넓은 신축 아파트로 전세를 나갔다.

 

각자 방을 하나씩 배정 받은 아이들은 너무나 좋아했고 큰 아이는 매일 청소를

하면서 새 집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못되어 남편과 떨어져 지내던 나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세장의 편지가 식탁에 놓이고 아이는 교복을 벗어 둔 채로 사라졌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사랑하는 엄마에게...

동생에게...

 

떨리는 손길로 편지를 감히 읽어 내려 갈 수가 없어 담임과 또 평소 우리 집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불러서 편지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이어서 경찰이 도착하고

산골 주변에는 경계령이 발동되고 기동대가 아이가 잘 가는 야산과 골짜기로 급파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전단지가 만들어지고 그 전단지는 읍내 가게와 버스 정류장등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오직 살아만 있어 달라는 내 생에 있어서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한 경우가 없을

정도로 피맺힌 기도를 했다. 그로부터 세시간 후 아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근 도시의 기차역에서 공중전화였다.

 

"엄마, 빨리 데리러 와,여기는 기차역이야 ".

채 말도 해 보기전에 공중전화의 신호음이 들렸다.

 

한 시간 걸리는 기차역으로 가면서 맞벌이한다고 제대로 아이를 챙기지 못한

나의 부족함이 아이의 목소리와 편지에 겹쳐서 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도 소풍을 따라 간적 없어 늘 그게 아픔으로 남은 아이였고

비교적 너그러운 작은 아이를 너무 이뻐한다는 아이의 소리를 큰 아이 답지

못하다는 꾸중으로 지내온 지난 시간들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 서면 늘 썰렁한 작은 공간에서 혼자 지내야하는 아이의 외로움과

맛있는 간식 해 놓고 문 열어 주는 엄마를 부러워 하던 아이의 그 눈초리가

그대로 필름으로 이어져 다가왔다.

 

점잖고 말없는 아빠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아이를 자상한 엄마가 되어

보담아 주고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는데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장일로

진작 내 아이의 이야기는 들어 주지 못했다.

 

쉬는 날이면 요리를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청을 공간이 부족해서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들어 주지 못한 것도 가로수 사이에서 나뭇잎

되어 가슴속으로 파고 날아 들었다.

 

부은 눈에 기차역이 들어 왔다.

광장에는 노숙자들이 드러 누워 있고 조금 떨어진 벤치에 가방을 껴안은

큰 아이가 모자를 눌러 쓴 채로 앉아 있었다.

 

아이의 행선지는 외갓집이었다.

너무나 자상한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산골을 벗어나 넓은 세상에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버스에서 지갑을 잊어 버려 가방속에 남아 있던 이백원 동전으로

공중전화를 걸고 나니 앞이 캄캄하더라는 말했다.

 

멀리서 남편이 한걸음에 달려 오고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부부는 밤새워 대화로 하나씩

짚어 나갔다.

 

그러나 결론은

사랑으로 덮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산골에 아이의 소문이 사람들의 추측을 보태서 일파만파로 퍼지고

처음 일주일간은 밖에 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있듯이 그 와중에서도 참으로 고마운 지인들이 있어서 버텨낼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아이를 위해서 참기로 했다.

 

의도적으로 큰 아이를 많이 추켜 세우고

아이가 그렇게도 원했던 개를 키우게 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9개월이 흘렀다.

여전히 학교는 지각 대장이고 가끔씩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글짓기와 춤등으로 학교를 빛내는 일이 많아 학교의 명물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또래의 아이들이 폭력 사건으로, 또 절도사건으로 엄마들이 경찰서에 불려 갈 때

아이에게 고맙다고 했다. 비록 스스로 심하게 앓지만 다른 이들에게 그런 피해는

주지 않았으니.......

 

자식 키우는 부모는 남의 아이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 교훈을 입증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 큰 아이는 얼마전에 내가 선물한 이루마의 피아노를 즐겨 듣고

야니의 재즈를 즐겨 연주한다. 아이가 원하는데로 이제 이 산골 생활을 접으려고

한다.

 

아이의 바램대로 훌륭한 작곡자가 되어서 자기의 음악을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고 싶어 하는 꿈이 이루어지길 엄마로써 축복하며 힘들었던

지난날들의 눈물이 행복의 웃음으로 크게 돌아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