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나뭇잎을 몽창 뽑아 버렸다.
한달전부터 입기 시작한 내복을 오늘도 어김없이 입고
목위까지 올라오는 목 티를 내복위에다 입었다.
목 티 위에 허리에 가는 벨트가 달린 밤색 티를 또 입고, 골덴 바지를 겨울 옷 바구니에서 찾아
내복입은 다리 위에 끼고 털 달린 청자켓을 걸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데
미련이 남은 늦가을 바람이 내 뺨을 힘껏 때리고 모르는척 도망을 갔다.
“겨울이구나... 젠장.”
나뭇가지를 쳐다보며
“몇장밖에 안 남았네... 헛헛하군.”
매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빴다.
오늘부터 호박고구마 세일하는 날이라 고구마를 비닐에 담아
원하는 만큼 저울에 달아 주느라고 바빴다.
한 냄비 삶아서 시식을 시켜가며 설명해 가며 난 입이 컬컬하고 목이 피곤한데...
손님들은 못 알아들었는지 알면서도 또 묻는건지...
“진짜 호박 고구마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더 달고 샛노래야 하는데...”
농사라는 것이 기르는 농부에 따라 땅의 토질에 따라 좀 다른 것이지
호박고구마가 아닌데 호박고구마라고 할까봐 속아만 살았나 속으로만 궁시렁씨부렁 거렸다.
작년에 엄마가 사 준 분홍빛 내복을 입었는데도 어깨가 시렸다.
고구마 담아 주고 돈 받는 손끝이 시렸다. 참 추운 날이구나.
그래도 손님이 많아서 힘든 줄 몰랐다.
손님이 없어 멀겋게 창밖을 내다보거나, 할 일이 없어 신문이나 뒤적이거나.
일 도와주는 아줌마랑 한 얘기 또 하고 껌 씹듯 되씹어 단물 다 빠지고 아구가 아픈 것보다
손님이 많아서 발바닥 밑에 솜 넣은 듯이 묵직하고 목이 타서 물이 수시로 마셔도
상처나 터진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려면 하루종일 바빠야한다.
밥 편히 먹을 시간이 없어도 좋다.
밥 한숟가락 먹다 손님이 오고 식어진 밥 다시 먹다가 손님이 오면
나중엔 헛배가 불러 다 먹지 못하고 설거지통에 버려도 아깝지 않고 좋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줄지어 손님이 들어오고 사과 상자가 비어가고,
귤봉지가 손님의 손에 들려 찬 바람을 맞고 손님 따라 걸어가고,
고구마 박스를 세칸씩 쌓아 두었던 것이 두칸으로 내려 앉아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살짝 마른 늦가을 낙엽처럼 가벼웁다,
늦가을 바람에 줏대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신문지처럼 가벼웁다.
그러고 있었는데...처음보는 손님인듯한 아닌듯한 아리따운 여자분이 나를 보고
“저...개망초님? 아줌마닷컴...”
“네..누구시죠?”
“패랭이예요.”
“아? 어머나!! 답글 잘 달아주시는 분?”
난 얼른 손을 잡고, 사실 손을 잡고 싶었는데 팔을 잡은 듯하다.
“여기까지 이 먼곳까지...고마워요.”했다.
반가웠다.고마웠고,당황스러웠다.쑥수러웠다.
내가 뭐라고 이 먼 곳까지 이 추운날에...
“따님이 이번에 수능 보지요?”
그러면서 쇼핑백을 내민다. 수능 잘 보라고 선물을 사오고,
피천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집도 들어 있었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실까...아이들까지 몇학년인지도...
어쩜 저리 이쁘고, 피부도 곱고, 옷도 세련되고, 머리도 단정하게 묶고,
머리묶은 털보송한 핀까지 참 이쁘네...
그리고 나를 봤다. 머리 부스스하고 피부 푸석거리고 춥다고 옷 많이 껴입고
작업복 스타일로 대충 입고...편한 검정 슬리퍼 신고...
대여섯가지 쓸때없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먹어 들어가도 아리따운 여자이고 싶고,
고구마 장사를 해도 장사치고 싶지 않은가보다...
“언니? 차 한잔 드려?” 일 도와주는 동생이 먼저 손님 대접을 하라한다.
아니 내 정신 좀 봐. 이 먼 곳까지 아무 이득도 없고 조건도 없는 마음으로 날 찾아왔는데..
“이리 앉아요. 뭔 차 드릴까요?” 밥 먹고 차 마시는 소죽통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했다.
그 곳에도 고구마라는 년놈들이 자리를 차지해 퍼지게 앉아서는 내가 저쪽으로 가라고
눈치를 줘도 꼼짝들을 안하고 늦가을날 찾아온 아리따운 손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페인이 없는 것을 원하길래 대잎차를 준비했다.
속살이 다 보이는 유리잔에 유리잔 받침을 깔고...
귤을 꺼내서 봉지채 탁자위에 놓았다. 패랭이님 먹으라고 내 놓은 귤을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 얼른 까서는 낼름 먹었다.
글에 대해 좀 쑥스럽고 해서...나를 보기 위해 추운날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주소도 모르고 전화 번호도 모르고 그랬는데...이걸 어떻게 보답해야하나...
“능소화님이 답글에 상세히 적어 주셔서 잘 적어 두었다가 찾아왔어요.
개망초님이 싫어하면 어쩌나 바쁘시면 어쩌나 안계시면 어쩌나 했어요.“
“능소화님도 한여름에 한참을 헤매시다가 찾았데요. 선물님도 오셨었는데 그때 제가 없어서 못봤어요. 다 들 고맙고, 반갑고...용기가 생겨요. 또 다시 글을 써야겠구나하는...”
저녁 먹고 가요. “당연히 저녁 먹고가야죠.”
제가 사 드릴게요. 여기까지 오셨으니...“안돼요. 팬인 제가 저녁을 꼭 사게 해 주세요.”
참 젊고 예쁘세요. “예쁜사람이 예쁜사람을 알아 보네요.”
참으로 편하고 다정한 분이다.
언제나 답글을 제일 길게 제일 재미있게 제일 속시원하게 달아주시기로 유명한 패랭이님...
해물뚝배기 비빔밤을 먹으며 맥주 한병을 나눠 마셨다.
나는 내 글에서만 본 느낌과는 달리 밝고 긍정적이라고 했다.
패랭이님은 답글에서처럼 솔직하고 재미있고 말도 참 잘하셨다.
처음 본 사람하고 말을 잘 안하고 붙임성도 없는 내가 상대적인 패랭이님을 만나서 그런지
말도 술술 잘 풀리고, 술도 살살 잘 넘어가고, 시간도 스리슬쩍 잘도 흘러갔다.
매장 걱정부터 첫사랑이야기도 남편에 대한 미래까지 솔직하고 덤덤하게 말을 했다.
내 글을 속속들이 다 아는 패랭이님 앞에선 거짓은 안통하니까.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바람이 진하게 나의 분홍 내복 속까지 파고든다.
갈색치마를 입고 갈색 스타킹을 신은 멋스러운 패랭이님 다리에도 파고 들었을거다.
버스를 타러 음식점을 지나 매장앞을 스치는 골목은 검정색 어둠이 짙고,
혼자라고 우겨도 혼자살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혼자라서 떠나가는 가을이 거치장스럽고 걸리적거렸다.
일요일인 어제는 갈 곳이 없어 하루종일 집에서 자고 또 자고 티비를 보고 또 보고해서
머리가 빙글 한바퀴를 돌아 어지럽고 아팠다.
요즘 글 쓰는 시간도 마련하지 못하고 글 써야 할 능력과 재주의 한계를 느껴
손을 놓고 있었는데...
패랭이님 같이 글 보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고 에세이방을 지켜 주시는 님들이 많아서
난 다시 글을 써야하는 이유와 보람과 꿈을 알게 했다.
“시골가서 살면 패랭이님 꼭 와야해요?”
“그럼요. 우린 기다리고 있지요.”
“글로 써 놓고 지키지 못할까봐 걱정이예요.”
“늦어질지는 몰라도 꼭 살게 될거예요.”
“시골가서 살 남자 있음 좋겠어요.”
“우리 나이가 시골가서 살고 싶은 사람이 많지요.그렇게 될거예요.”
"그럼요.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요.그렇고 말고요.”
히히히헤헤헤
서울역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지하철을 타고 상계동? 방화동?
그 옆 동네라 했는데 잊어버렸어요.죄송...
서울역을 가는 시외버스를 탄 패랭이님에게 손을 흔들며 난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없이
빈손만 흔들어 주었다. 바람이 진짜 늦가을이군.젠장...
집으로 오니 딸아이는 수능시험 보는 자기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 옆에 아들아이는 누나를 도와 선물을 같이 싸고 있었다.
참고로 딸아이는 수시가 합격이 되어서 수능시험을 안 봐도 된다.
수시 합격된 딸아이의 이야기는 졸업하면 그때 자세히 쓸 생각이었다.
패랭이님이 준 선물이라며 딸아이에게 주니 부엌에 있던 엄마까지 오셨다.
윷놀이 하듯 빙둘러 앉아 요술주머니처럼 싼 포장지를 펼쳐 보았다.
“우~와~ 우리 엄마 인기 좋으네...대단하다.”
선물을 펴니 색색색 과일로 만든 찹쌀떡이었다.
“내가 고3인줄 어떻게 아셔?”
“니들이 내 글의 주인공이잖어.” 아이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 이야기는 안 쓰니?”엄마가 섭섭하듯 물어보신다.
“엄마는 더 주인공이지.”엄마도 흡족하게 웃으신다.
“거기서 여기까지 왔어? 젊어? 이쁘다고? 고생을 안했나보다...너도 고생을 안했으면 이쁠텐데...”
엄마는 또 저러신다. 맨날 나만 고생한다고 마음 아파하신다.
엄마가 나 때문에 더 고생하시면서...에그..눈시울이 왜 이리 뜨끈하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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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쓴 패랭이라는 분은 에세이방에서 답글을 잘 달아주시고
제 글을 보고 무족건 찾아오신 분이랍니다.
감사해서 이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