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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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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감나무


BY 낸시 2004-10-18

한국 가게에 가니 단감이 나와 있다.

열 두 개들이 한 상자에 10불이 넘는다.

워싱턴에서 살 때만 해도 그 정도는 4불이면 살 수 있어서 대 여섯 상자씩 사다 두고 먹었었는데 여긴 너무 비싸다.

내가 감을 좋아하는 줄 알고 감 사는 일에는 인심이 후한 남편도 사자 소리를 않는다.

나도 차마 사자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냥 돌아서 나오니 마음 한 쪽 구석에 섭섭함을 지울 수가 없다.

고향 마을의 감나무들이 절로 눈에 선하다.

꽃보다 고운 빛깔의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겠지...

내감나무 생각도 난다.

내감나무와 함께 아버지도 어머니도 생각이 나서 목울대에 뭔가 걸린 것만 같다.

울 아버지는 그 감나무를 막내딸감나무라고 불렀다.

씨도 없고 유난히 맛이 있는 감이었는데...

 

아버지가 접을 붙였던 그 나무엔 내가 결혼하기 전 해 처음으로 감 여섯 개가 매달렸다.

아버지는 여섯 개 밖에 매달리지 않은  그 감을 따면서 가마니를 동원하였다.

첫 수확을 그렇게 해야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법이라고 하면서...

유난히 감을 좋아해서 가을이면 감나무에 매달려 살던 나는 그 감 맛을 보고 즉시 알았다.

당도가 다른 감에 비해 유난히 높다는 것을...

당도가 높은 감 중에는 뒷맛이 느끼한 것들도 있는데 그 감은 먹고 난 뒷맛까지 깔끔해서 더욱 좋았다. 

얌체 기질이 있던 나는 그 감은 내감이라고, 내가 결혼해도 그 감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내것이라고 주장했다.

막내딸을 떼어 놓을 것이 섭섭해서 였을까, 아버지도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즉석에서 그 이름을 막내딸감나무라고 지었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울 엄마는 고속버스를 타고 전라도 시골 마을에서 서울까지 직접 배달에 나섰다.

막내딸이  좋아하던 감이라고, 그 먼길도 마다하지 않고,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마중 간 언니에게 그 감은 만지지도 못하게 하였다고 언니는 섭섭해 하였다.

언니에겐 다른 감을 주고 그 감은 막내딸 감이라고 만져보지도 못하게 하였단다.

 

결혼한 후 가끔씩 남편에게 투정하기도 하였다.

"당신한테 눈이 멀어 그 맛있는 감도 실컨 못 먹고..."

먹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는 즐거움은 먹는 즐거움에 못하지 않다.

바라보는 것 뿐이랴.

감나무에 올라 장대로 이리저리 골라 홍시를 따 먹는 재미 또한 빼 놓을 수가 없다.

 

내 고향 마을의 감나무들 아직도 있을까?

가지가 찢어질 만큼 발갛게 익은 감을 매달고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을까?

귀 밑에 솜털이 보시시한 쬐끄만 가시나도 하나 매달고 있을까?

가을이면 감나무에 매달려 살던 옛날 그 가시나 머리에는 서리가 허옇게 앉았는데...

아니면 우리가 마을을 떠나 이렇게 나이들어 가듯 감나무들도 나이가 들고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중일까?

감나무는 수명이 삼십년쯤 된다고 하였는데 내감나무가 살았으면 하마 지금쯤은 고목나무 소리를 듣겠지?

해마다 가을이면 울먹이는 가슴으로 내가 자기를 그리워 하는 줄 차마 알까?

울아버지 사랑이랑 울엄마 사랑이 같이 매달려 있는 것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