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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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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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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5


BY 인 연 2004-10-18

에피소드 5


"인생은 세 가지 길 밖에 없대. 방관하든가, 달아나든가, 부딪치는 것."

이 말은 [시티 오브 조이]라는 영화의 대사 일부분이다.
두고두고 곱씹어 봐도, 지난날을 되돌아봐도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관傍觀, 도망逃亡, 직면直面이라는 이 세 가지의 낱말 뜻을 음미하고 있노라면 
나의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진원 박씨 9대손 종손인 아버지는 조석으로 억척스럽게 부지런하였다. 
종손은 동창이 밝기가 무섭게 들로 산으로 나갔다가 해가 중천에 가까워질 즈음
귀가하였는데 지게 위에는 물먹은 꼴이 태산만큼 솟아 있었고 종손의 삶은 꼴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종손의 일그러진 표정과 굽었던 허리를 펼 때가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저 물끄러미 종손의 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농사일에 인생을 묻어 버린 종손을 이해하게 될 즈음에 농사일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깨닫게 되었고 종손의 삶 속에 일각이라도 귀속되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는 학교에 가는 것이 싫어 달력의 붉은 글씨가 천국처럼 느껴졌지만 농번기가 
되면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지옥처럼 고통스러웠다.
특히 오전 수업뿐인 토요일은 화장실 청소를 자청할망정 해가 벌건 대낮에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조차 떼기 싫었었다. 
그러나 나는 다행스럽게도 종손의 집요한 교육열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종손의 
삶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있었으나 책가방을 내려 놓기가 무섭게 들로 산으로 나가 
부모의 일을 거들어야 했던 이웃집 친구는 공부한답시고 빈둥거리는 나를 늘 
부러워했다. 
이웃집 친구가 농노農奴라면 나는 부르주아였다.
종손은 인생 절반을 자식의 미래를 위해 농노처럼 살았지만 친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농노처럼 살았고 나는 부르주아처럼 방관하고 도망하며 생을 허비했다.  

인간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친구는 지금 스스로 부자라고 말한다.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다녔던 가난의 흔적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고급 승용차와 골프가방에서는 돈 냄새가 나고 압구정동의 유명 산부인과에서 
이쁜이수술을 했다는 마누라의 몸에서는 불란서 제 향수냄새가 풍긴다.
친구는 내가 에세이를 출간했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나중에 자신의 자서전 대필을 부탁하겠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몸보다 몇 배나 크고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오던 기억과 이슬을 
털어 가며 망태기 가득 꼴을 채웠던 기억들은 다락 속에 감추어 버린 지 오래된 것 
같았다. 종손의 삶보다 더 힘들게 살았던 친구는 이제 과거를 되돌아 보지 않는다.
친구의 과거는 계륵보다 불편하고 사족보다 허망한 존재일 뿐이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남들이 물으면 나는 시쳇말로 아등바등 산다는 대답 밖에 
나오지 않는다. 
황량한 타국에서 지난 삶을 되새기다 보면 아쉬움만 가슴에 사무칠 뿐이다. 
타국에서 생활한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차위반 딱지를 벌써 세 장이나 발부 
받았다.
단속요원이 눈앞에서 딱지를 발부하는데도 영어가 안돼 아무런 대처나 변명도 할 
수가 없었고 맥없이 반복하는 I am sorry라는 말이 집 나간 며느리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허망했다.
얼마 전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 학교식당에서 파는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일주일 동안이나 등교도 못하고 고생을 하였다.
아이는 두통과 고열 그리고 복통과 설사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내도 덩달아 잠을 
자지 못해 지쳐 갔지만 내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변에 사는 교민들도 걱정은 태산같이 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약국에서도 식중독은 약사가 직접 약을 처방을 할 수없다며 앰뷸런스 불러 병원으로 
가라고만 하였다. 일요일이라 학교조차 연락이 안돼 더욱 난감했다.
아이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아내는 더듬더듬 911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스럽게 
앰뷸런스는 왁자지껄 달려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아이의 상태도 확인하지 않은 채 문밖에서 횡설수설 떠들다 식중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대책없이 되돌아가 버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아 더 붙들고 명쾌한 답변도 질문도 주고 받을 수도 없었다.
한국 같았으면 고래고래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나는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민족이 겪는 설움보다 영어를 터득하지 못한 내가 더 한심스러웠다.
하는 수없이 미국을 좀 안다는 교민들께 직접 묻고 물어서 어렵게 집 근처의 병원을 
찾아갔지만 접수하고 진료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병실복도에서 세 시간이나 
파죽음이 되어야했다.
이것뿐만 아니다. 의사의 간단한 진료에 이어 병실에서 간호사에게 링거액과 주사를 
맞고 누워 있다 원하지 않은 가검물 검사를 받는데 무려 천 삼백 달러의 청구서가 
배달되었지만 식중독의 진원지가 식당음식이었다는 검사결과가 나왔는데도 책임이 
있는 학교는 결과에 대하여 어떤 답변도 없이 거대한 공룡처럼 침묵할 뿐이었다.
타국에 대한 무지無智함의 결과는 혹독했다. 아니다. 이 나이를 먹도록 삶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방관하고 달아나고 부딪치지 못한 결과였다.

종손은 힘든 농부의 삶을 향하여 투신했고 친구는 온갖 육두문자肉頭文字가 난무하는 
시장바닥에서 청춘을 보냈다.
종손과 친구는 주어진 현실을 방관하지 않았고 그 곳에서 달아나지도 않았으며 몸이 
상할지언정 과감하게 부딪치는 편을 택하였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결과가 어떻든 지난 날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오히려 고양이를 향해 몸을 던지는 
법이다. 이제 나의 남은 인생에는 방관이나 도망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오직 직면이라는 단어만 생각하며 거대한 공룡과 몸소 부딪쳐야 한다.
아직도 영화의 대사가 귓전에서 맴을 돈다. 그래서 오늘밤이 더욱 깊다.

"하지만 방관하는 것이 더는 허용되지 않을 때는 달아나거나 부딪치는 수 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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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포트리에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