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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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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기 휘날리던 날


BY 자두 2004-09-11

 

동구 밖 과수원 사과가, 붉게 더 붉게  가을로 물들던 그 날은, 시월의 어느 하루였다.
붉은 빛으로 색을 더해가며 뽀얀 속살을 다져 갈 때 즈음, 내 어린 시절의 꿈은 드넓은 운동장에서 달음질 치고 있었다.
이른 새벽 잠을 더 청해도 좋을 시간, 감은 눈꺼풀 안에서 구르는 눈동자의 시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차라리 눈을 뜬다.


한달 여를 땡볕에서 열심히 연습하던 가을 운동회 날.
아침 준비에 바쁘신 엄마를 졸라 일찍 아침밥을 먹고 새빨간 홍옥 하나 손에 쥐고 닫을 필요도 없던 형식만의 대문을 나서면 동구 밖 오솔길엔 짙은 안개가 드리워 있다.
바로 저 앞에 무슨 풍경이 그려져 있는지 가늠할 수 조차도 없을 정도로 희뿌연 안개다.
바람 한 점만 스쳐도 까맣게 영근 씨앗이 주루룩 쏟아질 것 같은 가을들풀 잎새 위로 밤새 내려앉은 이슬은, 지금 생각 하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새빨간 만화그림 그려진 운동화, 그 위로 올라온 하얀 양말 목을 흠뻑 적시기에 충분했다.
굽이진 산모퉁이 휘돌아 논밭 사이로 또 과원을 스쳐지나 들어선 학교 운동장, 그곳엔 아직도 안개가 하늘을 덮었다. 교무실 옆 현관 중앙 문에서부터 운동장을 둘러 선 거목 플라타너스 까지 연결된, 보일 듯 말 듯 주렁주렁 매달린 만국기는 넘실거리며 파도를 일궈내고, 어디 선가 무리 지어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내 국민학교 어느 해 가을 운동회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찍찍  울리는 잡음 섞인 마이크가 모이라는 신호를 알리면 연습에 익숙해 있던 아이들이 줄을 서고 이내 시작 되는 국민체조, 교장 선생님의 정정당당히 싸우라는 당부는 물론이고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아우성 들이다.
지금처럼 고무밴드에, 태극무늬 까지 잘 인쇄된 머리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길게 자른 무명 청백 끈을 머리에 두르고 승리를 향한 함성은 누가 말릴 수도 없는 아이들 세상의 치열한 삶이었다.


그 동안 연습했던 저학년 아이들의  포크댄스 손가락엔 빨강노랑 종이 꽃 달고 그 시절엔 근사한 짝짓기 무용이었다. 화려한 부채춤도 빠지지 않았다.
100m 달리기는 빠져서는 안될 운동회 프로그램, 난 아직도 그 출발선의 총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얼마나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던 소리인가…
그땐 1,2,3등 찍던 보랏빛 스템프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차전놀이며  공굴리기, 발 묶어 달리기, 콩 주머니 던져 바구니 터뜨리기…. 어느새 오전이 지나간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면 운동장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솜사탕 아저씨, 하루만 쓰고 나면 부서질 장난감을 파는 아저씨, 아이스깨끼 아저씨, 오색의 색 풍선 장수,어찌들 알고 왔는지 총 집합이다.
보기만 해도 흥겨운 잔치가 아니었나 싶다.
돌아오는 길, 상품으로 받아 든 공책이라도 안으면 기분은 하늘을 나를 듯 기뻤다.
손등에 찍힌 달리기 등수는 행여 지워질까 몇 날을 아껴서 씻었는지....
 
지금 또 이 가을을 맞으며 어린시절 운동회 날로 잠시 돌아가본다. 걱정도 없고 웃음만 있던 내 국민학교 시절, 이젠 국민학교란 이름 마저도 사라지고 고무줄 뛰기 하던 친구들, 또 그 고무줄 끊고 도망가던 사내녀석 들도….
너무나 멀리 또 아득히 떠나온 세월 뒤로 그 운동장에 둘러선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그늘이 언제부터인가 늘 궁금하다.
오늘도 땡볕아래 그 운동장에선 운동회 연습이 한창일까?
지금도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