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
모처럼 밤늣은 시간까지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퉁퉁부은 다리를 쉬어주며 느긋하게 휴일을 보내려던 계획을 틀어지게한 전화벨 소리가 이른아침의 적당한 소음과함께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 옥현이 엄마예요"
"아! 안녕하세요"
"오늘 쉬는날이라면서요"
"네"
"잘됬네, 충장로 조흥은행앞으로 10시까지 나와요"
"무슨일로 그러시는데요"
"만나서 갈곳이 있어서그래요, 그러니 있다 봐요"
"네"
허겁지겁 아침을 먹는둥마는둥 하며 옷을 차려입고 약속장소로 나갔더니
어머님 아버님 두분과 왠 아주머니 두분이 함께 계셨는데 한분은 시 이모님이 되실분이고
한분은 진 외가의할머니뻘이 되신다며 인사를 하라고 하였다.
엉거주춤 인사를 드리자 마자 시간 절약을 하신다며 은행의 맞은편 건물 4층으로 함께 이동을 하였다. 가보니 귀금속을 세공하며 , 팔기도 하는곳이었다.
" 금방 전쟁이 일어날것 같다더라, 전쟁나면 제일먼저 금값이 올라가잖니,그러니 금값오르기전에 패물부터 맞춰야 할것같아 이리로 널 부른거야"
"네" #$%^&?
청혼 받은적도없고 양가 상견례도 없이 패물부터 받아챙기고 히히낙낙거렸던 여자는
이 대한민국땅에 나 혼자가 아닐까 싶다. 또 해낭 땅끝마을 신혼집에서 최초의 부부싸움을하고 집을 나가 갈곳없어 바닷가를 배회하다가 밤늣게 전화하여 걱정하고있을 남편에게
했던 한마디가"개 밥줘" 였던 여자도 나 혼자이리라.
새삼스레 남편과의 첫 만남과 함께했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86년 2월 스물셋 한창나이에 그래도 지방에서는 제법 컷던 백화정의 창립 1기사원으로 입사하여 , 온갓 끼를 발휘하며 동료들과 상사들의 사랑과 질시를 한몸에 받으며 약간의
자아도취 성향을 보이고 있던중에 내가 어린시절부터 믿었던 기독교를 사장님도 믿고 계셨는지라 , 직장네에 신우회가 조직되어 예배를 드리게되었다.
신앙생활을 등한시했던 나도 예배에 참여하게되고 그러다보니 잃었던 믿음도 다시 생기게되어 신우회에 오셔서 말씀을 해주시는 목사님의 교회도 나가게 되었다.
지하에 있는 조그만 계척교회였지만 청년들이 많아 우리 신우회 회원들과 서로 교류하며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 남자를 처음보게되었다.
처음 교회를 방문한 우리들에게 청년회 회장이라며 , 대부분이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청년회지만 직장인인 우리도 청년회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했으면 한다는 안내 광고를 하는데
잘생긴 얼굴이 빨게지면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그냥 참 인상이 좋고 잘생긴 사람이구나 했지 특별이 인연을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동갑이거나 한두살 정도 차이나는 회원들이 꽤 되다보니 항상 화기애애하고 상부상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이 되었고 예배후에 귀가길도 같은 방향이면 함께 동행하는것이
당연하였다. 나도 동행자가 여럿 있었고 그사람도 가끔 그 무리에 끼곤 했지만 내게 관심을보이는 그사람 친구나 후배만큼은 아니었다. 그이랑 나는 동갑이다. 어느날 차한잔 하자며 청하기에 흔쾌이 응하고 만났는데 고민이 있단다.무슨 일이냐니까 우리보다 두살 어린 자매랑 가까이 지내고있는데 어머니께서 그자매의 가정환경을 들먹이며 교제를 반대하시는데
내 의견은 어떤지 물었다. 그당시 나는 다섯 남자형제들 틈에서 유일한 여자로 자라다보니
화통하고 와일드한면이 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역을 도맡았을뿐아나라 남자 세계를 잘 이해해주는 맘 너그러운 여자친구로 통했던지라 아마 그이도 내게 조언을 구했던것같다.
아무튼 무어라 조언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서로 그렇게 편안한 친구로 어울렸던것같다. 도리어 두살 어렸던 남자 후배가 나를 좋아했는데 당시만해도 연상녀와의 교제가 드물었던때라 후배가 갈등을 했나보다 난 남자가아닌 동생으로 자기를 좋아했다는것을 알고있다면서 옥현이 형이랑 잘 어울리니 잘 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별 관심을두지 않았다.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도 많고 정말 멋진 선배도 있고 해서인지 이성 교제 보다는 신앙생활을
더 재미있어 했으니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나이 스물일곱 가을무렵이었다.
그사람은 대학4년이 되었다. 어느날 1부 예배를 드리는중에 그사람은 성가대석에 있고 나는 여전이 출근관계로 신도석에 있었는데 자기눈에 너무 예쁜 아가씨가보여 자세히 보았더니
나였단다. 그날 이후로 눈에 비늘이 덮였는지 내가 너무 야물고 똑똑하고 예뻐서 누가 금방
체갈까봐 안절부절이라며, 대기업 취업시험 준비중이면서도 내가 퇴근할 시간이되면 회사앞으로 나와서 기다렸다가 데이트를했고, 여성들만 사는 금남의집 아파트에 살았던 까닭에 통금시간인 밤 12시 안에 데려다줘야해서 겨우 손이나 잡고다녔지 키스한번 못했다.
한번은 자신이 좀 비참한 생각이든다며 남들 데이트 끝네고 들어가는 시간에 자기는 백화점페점시간이 지나야 겨우 데이트를 시작하고 얼마안있어 금방 헤어지니 몹시 처량하단다.
환경이 어쩔수없는 상황을 만든것뿐이고 그렇게 이성에 무감각했던 내게도 설레고 두근거리는 핑크빛 계절이왔고 때로는 환희에 넘치는날이, 때로는 별거아닌일로 다퉈서 냉전중인날이 지나가며 우리의 연애가 무르익어갔다.
그사람이 드디어 대기업의 그힘든 취업 관문을 뚥고 90년 12월 첫발령을 받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어머님은 나이가 동갑인데다 내가 당신 아들을 쥐고 흔들 타입으로보인다면서 결혼을 반대 하셨는지만 그사람 대학 졸업식때 처음 뵈었던 아버님은 내가 맘에 드셨던지 먼 해남 땅끝으로 가게된 아들 혼자보내지말고 결혼 시켜서 보내자며 어머님의의견을 일축하셨다고 한다. 어쨌든 그이는 신입사원 연수교육 때문에 광주에없고 나또한 그렇게
금방 걸혼할줄 몰랐기에 페물부터주시는 시어른들이 당황스러웠던건 사실이고 그때까지도 철이 없는 관계로 페물을 직장에 가져가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건강한 대한건아 두명과 더불어 화목한 가정과 즐거운 지역사회 만들기(?)에 열심히 노력중이고 가끔씩 500cc맥주잔을 앞에두고 시국(?)을 논하기도하며 보통사람들의 보통의행복을 이어가며 활기차게 살고 있다. 여보 ! I LOVE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