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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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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야기-추억의 힘


BY 박경연 2004-09-07

7년동안 기다려서 결혼을 하고 13년동안 결혼생활을 지탱하게 한 힘, 그것은 언제나 짧은 기간의 추억 때문이었으리라.

 

대학 생활도 후반에 접어들던 그때 3학년 여름방학을 앞둔시점이었다. 학과 대표가 나에게 오더니 오늘

자기 대신 어디를 다녀오라고 했다. 여름방학 때 가게 될 농활지역의 답사를...

공대와 조인트로 농활을 가기로 했는데 그 쪽 대표와 우리 과 대표가 함께 가야된다면서. 나는 별다른 약속도 없었던터라 가벼운 기분으로 대신 가게 되었다.

 

그때 공대의 동행자는 3학년 대표와 2학년 대표 였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장도에 들어갔다. 그때의 가벼운 만남이 영원을 이어갈 첫 발이었음을 그도 나도 몰랐음은 당연지사.

머리가 조금 벗겨진듯한 3학년은 줄곧 나에게 온갖 친절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조금 귀찮은 느낌이었고 항상 조금 떨어져서 걸어다니던 그 후배는 왜 그렇게도 듬직해보이던지.

 

우리는 좀 늦은 오후에 답사지인 여주로 향했고 그곳에서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장님을 만나고 숙소를 둘러보고 산에 올라가 마을의 약도를 그리고...... 그 모든 일정을 리더한 사람은 언제나 2학년 후배였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늦었고 마을에 들어오는 버스는 끊겨있었다.

 

우리는 어쩔수 없이 읍내까지 1시간여동안 걸어가야만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며 설레이는 느낌이 든다. 그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힘임에 틀림없다.

걸어가면서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이 자세히 생각나진 않지만 젊은 날의 순수함과 미래의 희망으로 빛났음에 틀림없으리라. 겨우 읍내에 도착하여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를 탈수 있었다. 버스 속에서도 맨 뒷자리에 앉아 아마도 순수했던 젊은이의 열정으로 많은 얘기를 나눴던것 같다.

 

여름방학이 되자 우리는 다소 비장한 각오와 약간은 상기된 기분으로 그곳으로 여름봉사활동을 떠났다. 이름은 봉사활동이었지만 젊음의 확인과 다소 오만했던 젊음의 발산은 아니었을까? 약60-70명의 남녀 학생들이 마을에 도착하자 동네는 온통 잔치분위기였고 ,과연 학생들이 뭔가 도움이 될까하는 의아심을 품은 노인들이 힐끗 쳐다보시곤 했다. 우리는 어른들의 걱정을 씻어주려는 듯 조를 짜서 열심히 일터에 나갔다. 그런데 매일 새로운 조를 편성했는데 그와 나는 거의 대부분 같은 조에 편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씽긋 웃으며 일할 때의 힘든 시간을 이런 저런 대화로 삭혀가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는 담배농사를 많이 했는데 뜨거운 태양아래서의 담배밭은 찜통과 다름없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배려하려했지만 그때는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같이 고생하는 친구들을 보며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약 10여일의 농활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날 우리는 모두에게 주소록을 돌렸고 기념촬영도 했다. 단체사진을 찍고 돌아서려는데 그이가 갑자기 사진기를 든 친구에게 '우리 누나랑 사진 한장 찍어줘.'했다. 그 친구는 아무런 의심없이 사진을 찍어주었고 그 사진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증명서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줄 몰랐고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어떡게 해야하는지 모르는 초보 연인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제주도의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 이후 머리속에는 온통 그이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 전화번호와 주소를 모두 알았지만 어떡게 시작해야하는지 몰라 방황하다 편지를 썼다. 그저 무미건조한 문체로 잘 돌아갔냐고 어떡게 지내냐고 물었던게 편지내용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 편지를 부치고들어온 날 집의 우편함에 하얀 사각봉투가 들어있었다. 제주에서 보낸 편지. 분명 내가 편지를 쓰기 전에 부친 편지였다. 나와 비슷한 감정으로 조금은 방황했으리라. 그의 편지내용역시 그저 담담한 문체로 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몇번의 편지가 오간 후 개학을 하고 학교를 나왔는데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왜 보이지 않는건지?

 

멏달이 지안 후 군대에 간다는 소문이 들려왔을때 나는 놀라움은 뒷전이고 배신감이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달 후 하얀 사각봉투가 집으로 왔다. 포항에서 보낸 군인의 편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무엇이 미안한지 모른채 나는 또 집요하리만치 그에게 마음이 이끌려가고 있었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며 한 달에 한번 정도 일요일에는 6시 첫 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 동안 달려 도착하여 약 5시간동안 그를 만나고 돌아오고......

 

그러나 제대 후 복학을 한 그는 또다시 연락이 끊어졌고 나는 기다리고.

기다림에 지쳐 포기하려한 즈음 28살의 가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취직했다고. 결혼하지 않았냐고, 그리고 괜찮다면 자기를 받아주겠냐고. 너무 무미했던 우리의 만남에 비해 파격적이고 참 멋없는 프로포즈였던것 같다.

 

그리고 그가 28살, 내가 29살이던 11월 결혼을 하고 다음해에는 쌍둥이 남매가 태어나고. 숨막히게 전개되었던 우리들의 현실. 긴 시간에 비해 만남은 짧았지만 그 시간만큼이나 긴 우리들의 설레임이 연보라빛 추억이 되어 힘든 날들도 견디게 해주었으리라. 우리 쌍둥이가 13살이 된 지금도 그가 때로 미워질때면 그 옛날의 설레임을 떠올리며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