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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개비꽃과 미친여자


BY 개망초꽃 2004-09-03

사랑과 결부 시키지 말자.
꽃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뿐.

특히 그 놈과 비교하지 말자.
꽃은 한 자리만 사랑하잖아.

그 놈 이름을 울부짖었던 많은 세월을 증오하지 말자.
달개비꽃은 강아지풀을 증오하지 않거든.

그 여자의 영역을 침범하고서
행복하다고 헤헤 웃지말자.
잡꽃이 살 땅이 따로 있고
서양꽃이 살 땅이 따로 있고
프라타너스 나무가 살아가는 한 평 땅이 정해져 있잖아.

너가 비겁하다고 하지 말자.
내 스스로 벼랑에서 떨어졌으니까.

달개비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적이 있지.
너의 집 뜨락에 선명하게 피는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적도 있지.
안되는 일을 되고 싶어하는 내가 돌아버린거였지.
너가 나를 버릴 때 "미친년" 그랬었지.
맞는 말이였어.
지나고나니 알겠데......

오늘 12시쯤 버스 정류장에서 본 달개비꽃이
지독하게 이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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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 모퉁이에서 기다릴 버스도 없으면서
고개 빼고 있는 처량한 눈빛을 한 달개비꽃을 보니 그 여자가 생각납니다.
항상 여느날처럼 바쁘게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며칠전,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길다란 까만 머리에 갸름한 얼굴형과 바짝 마른 몸매를 가진 여자였습니다.
세상 짐도 무거울텐데 가벼운 몸에 힘겨운 커다란 배낭을 매고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그 자리는 내가 항상 앉아 있던 자리였습니다.
오늘은 안되겠구나 하고 그 여자 옆에 앉으려 했더니 그게 참 이상했습니다.
그 여자는 분명 버스를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골똘하게 한가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버스를 향해 몸을 좌측으로 돌리지 않았고 내가 옆에서 잠시 서성거렸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그 여자는 진득하게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얼굴빛은 햇볕에 그을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때에 쩔어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옷도 때 맞는 여름옷이 아닌 가을과 어울리는 겨울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한마디로 미친여자였습니다.
전 용기가 없었길래 그 여자 옆에 앉지 못하고
달개비꽃이 한무더기 피어 있는 길 가장자리 모퉁이로 자리를 옮겨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지만 버스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버스가 급히 왔다가 지나가도 몸을 조금도
움직인다거나 고개를 돌린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인생의 출발점도 종착역도 간이역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을뿐이었습니다.
달개비꽃은 파랗게 피어 고개를 돌리지도 발을 움직이지도 않고
버스 정류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오기전부터 여름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여름이 물러갈 시점에 와서도
달개비꽃은 그 자리에서 버스 정류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갈 곳을 모르는 그 여자나 버스를 타야할 이유가 없는 달개비꽃이
버스 정류장에서 오고가는 버스를 보고, 버스를 기다리고 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자리에 그러고 앉아 바위가 되고 화석이 될겁니다.

여름이 자꾸 져가고, 가을이 조금씩 밀려오는 늦여름.
하늘빛과 흡사한 달개비꽃잎과
그을린 햇빛과 닮은 그 여자의 얼굴이 버스 정류장에 있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린 적 없는 달개비꽃과 버스를 기다리지 않는 미친여자와...

그 후부터 잊혀졌던 꽃이름 달개비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플라타나스 넓직한 잎이 기운을 잃어 늘어져 있고,
여름에 피던 들꽃들도 자취만 남아 빈잎으로 휘청거립니다.
비어가는 여름 뜰에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달개비꽃에게 관심을 주었습니다.
하나의 줄기에 하나씩 꽃을 달고, 그것이 무거워 어깨를 앞으로 숙이고 있는...
꽃잎이 내 다리에 닿을 듯 합니다.
난 꽃잎이 다치지 않게 똑바로 걷던 걸음을 비껴 걸었습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은 듯, 달개비꽃은 싱싱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알아 볼 수 없게 생겨난 작은 얼굴은 상처가 난 것도 있었습니다
학교로 오고가는 아이들 신발주머니에 상처가 났을까?
부리나케 걸어가는 아줌마의 장바구니에 충격을 받았을까?
애기의 승용차인 유모차라는 것에 치였을지도 모르지...

그 여자는 왜 미쳤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등을 돌려 배신감에 갈 곳을 몰라 헤매이고 있는걸까?
돈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려 정신이 휘까닥 돌아 갔을까?
자식을 잃어 삶의 길을 몰라 버스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수년전에 이모팔을 지팡이 삼아 의지하면서 정신병원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난 하루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습니다.
밤마다 귀신이 나를 오라며 손을 내밀었고
땅바닥이 내 이마를 칠 듯 어지러워서 걷지도 못하고, 밥알이 모래 씹는 것 같아 먹지도 못하고,
잘 고친다는 병원이란 병원을 뒤적거려 다녀도 병명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간 곳이 정신병원이었습니다.
생각은 멀쩡한데 정신병원을 간다는 게 용납이 안되었지만
정신과로 가보라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길래 어떻해서든 귀신을 안 만나고 싶었고,
어떻해서든 걷고 싶었고, 어떻해서든 맛나게 밥을 먹고 싶었습니다.
정신병원에선 청진기로 진찰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백가지도 넘는 질문서에 시험을 보듯 문제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죽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있습니까?
1)두번이상 2) 다섯 번 이상 3)수시로 4)하루종일...난 4)번에다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시험지를 푼 결과 입원을 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정신이 완전히 돌아 아무도 못 알아보고 괜히 웃고 괜히 울고 하는 사람은
5%에 불과하고 나머지 나같은 사람을 정신병이라 한답니다.
그래서 입원 치료를 하라는 걸 이모와 난 생각과 마음은 멀쩡한데 왜 입원을 하냐고
우기고 우겨서 통원 치료를 하기로 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준 약을 때때마다 먹기 시작했는데..이거원 몽롱하고 알딸딸하고 잠만 오고...
하긴 이래야 쓸데없는 생각에서 멀어지니까 정신을 고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정신에 문제가 생겨 정신병이라는 병명을 얻으니까 정신이 바짝 차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서울 목동에 있는 한약방이 좋다길래 물어물러 찾아 갔더니
인정스럽게 웃던 한의사가 진찰을 해 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울화증이라 하더군요.
그러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갖지 말고 동네 아줌마라도 사귀며 수다라도 떨고
쇼핑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그러면 고칠 수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
아직 젊고 이쁜데 왜 이리 사냐고 하면서 내게 한줄기 희망을 안겨 줬습니다.
그리고 그때쯤 첫사랑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쓰면서 나를 달래고
내 스스로 헤까닥 돌려고 하는 정신세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름이 끝나갑니다. 여름따라 여름 들꽃도 져 갑니다.
여름이 달아납니다.
달아난 여름이 달맞이꽃을 가져가고,망초꽃을 훔쳐가고,달개비꽃 마저 따 갈려고 합니다.
가지고 가십시요.추억은 남아 있으니까요.
추억은 남아 가을이 의미있게 다가오니까요.

하늘색 달개비꽃은 아마도 가을 하늘과 바꿔도 될겁니다.
그래도 아무도 모를겁니다. 둘이 너무 닮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겁니다.

여름의 끝.
달개비꽃도 끝.
여름 들꽃, 우리는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