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노을빛은 아니어도 좋다.
피어나는 싱그러움으로 젖어들던 5월의 어느날 작은 씨앗을 묻고 손꼽아 기다리던 고향의 꽃이 드디어 꽃잎을 열었다.
해바라기 씨앗과 봉숭아 씨앗, 그 모양과 크기부터 달랐지만 한날 한시에 묻은 씨앗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해바라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직도 자라고 있다. 작디작은 봉숭아는 벌써 꽃을 피웠다.
그사이 한국을 애태웠던 민들레도 이곳을 거쳐갔고, 강한 바람에 굵은 장대비에... 그 모든것을 이겨내고 이젠 한떨기 고운 꽃으로 피어났다.
비바람도 이겨 냈지만 가끔씩 찾아와 주는 개미도 있었고 이름모를 벌레들도 있었기에 그리 외롭고 힘들진 않았나 보다.
주말엔 딸아이 손톱에 물을 들일 참이다.
우선 꽃잎을 모아야 하고, 잎도 좀 섞어서 작은 돌멩이 주워다 깨끗이 씻은 다음 콩콩찌어서 딸아이 작은 손톱위에 조심조심 올려 놓고, 그 고운 꽃물이 흘러 나오지 않게 실로 잘 동여매주어야지....
그리고 한밤 자고나면 쭈글쭈글해진 손가락 끝을 보고 웃음을 짓겠지만 그 고운 빛깔은 어떤 메니큐어로도 흉내낼 수 없는 자연의 빛이 될것이다.
누가 그렇게 말했던가?
손톱끝의 봉숭아 꽃물이 첫눈 내리는 그날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 진다고....
딸아이 첫사랑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첫눈을 맞으러 귀국을 해야하나?
나 잠시 우스운 고민에 빠져 본다.
유난히도 손이 고운 우리 한나...
피아노 건반위를 누비며 바하를 연주하는 딸아이의 유연한 손가락은 언제봐도 날 반하게 한다.
봉숭아 꽃물 들이면서 무슨 얘길 나눌까?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
떠나오기 전 우리집 앞마당의 봉숭아 이야기...
아니면 사춘기 딸아이의 남자친구 이야기...
그래 그게 좋겠다. 남자친구 이야기!!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걸까?
지금 저 봉숭아 꽃잎은, 타는 노을빛이 아니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