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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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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셔츠 맨


BY 天 2004-06-09

 

분홍셔츠 맨

 

필경 정신이 잠시 촐싹이며 어디로 황급히 내뺐거나,아님  아침 댓 바람부터 끓여 먹은 라면이 퉁퉁 불어터져 죽 쑤듯 속에서 부대끼고 있어서일 거다. 암! 그렇고 말고...그렇지 않고서야 걸레질 잘 하던 손길 때려 치우고 뜬금없이 미용실이 똥 마렵게 다급해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제도 그제도 머릿결이 벼락 맞은 여편네 마냥 사방 천지로 뻗을 때도 전혀 개의치 않고 꺼~억 트림 잘 하고 잘 지냈으니까...그간 게으른 천성이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아줌마인데 뭐 어때'라며 10센티미터도 넘는 강 철판을 상판에다 턱 하니 깔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될 게 없었으니까... 근데, 난데없이 미용실이라니.

 시계를 보니 잘만하면 모닝 파마 시간과 얼추 맞을 듯 싶었다. 아직 하품이 채 식지도 않은 아이를 다급히 깨워 모래알 같은 아침 몇 수저 떠먹이고, 역마살이 낀 바람 난 여편네처럼 부리나케 지갑을 챙겨들고 열쇠 구멍에 키를 꽂을려는 순간,

'오호 통재요! 우째 이런일이!'

바람 난 맘을 알았는지 미용실 사은 행사 전단지가 여편네 치맛자락보다 더 펄럭이며 문고리 붙잡고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돌팔이 점쟁이도 맞추지 못한 내 심보를 귀신같이 알아 맞추는 솜씨에 수박통이 쩍 하니 갈라지며 벌겋게 달아오른 속살 들킨 듯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기다 덤으로 가방까지 준다는 글귀에 눈이 빠져라 약도를 익혔다.

그간 꼴에 나이에 안 맞게 청순하게 살고저 생머리를 고수한지 여러 해.

이웃 아짐들이 날 볼적마다 내 머리 모양새에 조근조근 말 참견을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니 이 똥고집이 참 질기다 싶었다.

상가 2층에 자리한 미용실은 이름 부터가 숫제 널브러진 흔한 간판이 아니라 우린 뭔가 다르다는 의지가 꽉 담겨 있는 특이한 것이었다.

미용실 안은 오전이라  구석 자리에서 빠글이 파마를 하고 있는  중년 여자 손님 한 분이 다였다.

"어서오세용~~"

익히 알고 들은 코맹맹이 인사에 잠시 주춤하고 있던 내게 참으로 살갑게 자리를 안내했다.

"여기 앉으세~용"

"뭐 하시겠어용"

"그냥 꼬불이 파마 말고 자연스런 파마 하고 싶은데..."

"그럼, 디지털로 하세용"

생전 듣지도 못한 파마 이름에 "그래, 그냥 맡겨나 보지. 아님 말구' 하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앉았는데, '허걱! 왠 남자?'갑자기 바람머리의 다부진 분홍셔츠 맨이 미소 지으며 다가 오더니 참으로 자상하게 머리 스타일에 대해 설명을 한 뒤 옆으로 착 달라붙어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 얼마만에 맡아보는 총각 내음이던가?

더군다나 내 생전 첨으로 남자가 머리를 만져주는 순간이지 않는가?

내 속에서 일어나는'미쳤어!'라는 반란을 무시한 채 몽롱하고 알딸딸한 기운에 다리가 풀리는 듯 했다.

빠글이가 되든 뽀글이가 되든 이젠 그건 대수롭지가 않았다. 분홍셔츠 맨이 내 머릿결을 만져 주는 것만 해도 너무 황홀 지경이었으니까...

흘깃거리는 눈길에 행여 거울에 내 맘이 비칠까 염려하며 뚫어져라 내 머릿결을 주시하는 그의 열정을 올려다 봤다.

찌리릿 거리는 온 몸의 전율에 파르르 떨며 테이블에서 얌전히 앉아있는 아이가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 이건 나이가 들었다는 게 아냐. 아직 설레임이 있는 걸 보니 여자임을 잊지 않은 증거라구! 암. 그렇고말고'

가당치도 않은 헛 바람 을 두둔하며 파마하는 내내 청승을 떨었다.

디지털이라더니 사용하는 기구도 희한했다. 마치 머리에 큰 거품 덩어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샴푸 해 드릴께요. 이 쪽으로 오세요."

'허걱! 샴푸까지 직접!'

분홍셔츠 맨은 익숙하게 샤워기를 틀어 내 머릿결을 어루만졌고, 적당히 따뜻한 물 온도와 부드러운 샴푸질에 꿈결인 듯 잠이 오는 듯 했다. 연거푸 반복적인 손놀림은 두피 마사지를 덤으로 해 주며 세심한 배려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도 한 번도 해주지 않던 샴푸질을 왜간 남자가, 것두 참한 총각이 해주다니...

맘 속으로 뒷 꽁지에  꼬리 9개 달린 여우가 '오호호호' 하며 간사한 웃음을 날렸다.

아쉬운 샴푸질이 끝나고 드라이 더운 열로 머리를 말리면서도 작품이 어떻게 나올까 걱정이 되질 않았다.  그냥 이대로 계속 분홍셔츠 맨이 머릿결을 만져 주었으면하는 주책이 따라 붙었으니깐.

"잘 어울리시네요. 함 보세요"

세심하던 손길이 딱 멈추더니 둥근 거울을 내밀었다.

순간, 깜짝 놀라며 그가 내민 거울을 들여다 봤다.

'어머! 세상에. 디지털이 이런거였구나'

거울속에 비치는 내 머리 스타일은 '달려라 하니'가 되어 있었다.

"맘에 드세요?"

분홍셔츠 맨은 자상하게도 내 어깨죽지에서 더운 입김 내며 부드럽게 물어왔고,그 표정은

자신도 퍽이나 맘에 드는지 작품에 대해 공들인 뿌듯함이 묻어났다.

"아~네! 맘에 들어요"

아! '달려라 하니'면 어떻랴. 그가 만져준 머릿결이지 않던가?

계산하는 내내 관리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덧붙이며 어찌나 곰살궃게 대하는지 발길이 영 떨어지질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가져본 설레임이었다.

'그래, 이제 이 집을 단골로 하는거야. 그리고, 항상 분홍셔츠 맨을 자신있게 불러야지!'

상가 계단을 나서며 인파에 묻히는 내 등 뒤로 들리는 노랫말.

'연~ 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