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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스에 취해...


BY 天 2004-06-05

애초에 그 여자네 문턱에 발디딜 때부터 조바심이 났었다. 8년의 세월이 헛으로 건네지진 않을거란 걸 경험상 예견하고 있었으니까... 해서 주름진 마음 애써 태연히 펼친 채 너그러이 그녀의 흔적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자 다짐했었다.

첨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몸을 띄울 때만 해도 복도만은 쓸쓸하다 못해 휑한 냉기가 흘러 내 손이 거기까지는 필요치 않길 바랬다. 이제 더는 무식한 손놀림에 허우적 거리는 미련함을 덜고자 했으니까...

'띵' 외마디 간결한 소음이 7층 입구에서 날 밀쳐내고, 설 익은 여름 열기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발에 꼭끼는 슬리퍼 또각임을 하나 둘 헤아리며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그녀의 집으로 다가갔다. 회색빛 철문들의 냉정한  시선을 겹눈으로 넘기고 점차 좁혀지는 걸음에도 두려움이 묻어났다.

복도 끝 문전에서 한 눈에 날 알아본 그녀의 실체가 시커먼 주둥아리 내민 채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비열한 미소로 날 꼬아봤다.

벽면을 등지고 당당히 서 있는 낡은 거울과 한 쪽 귀퉁이가 날아가 버린 상과 아이들이 쉼없이 물고 내다버린 아이스크림 봉지와 그 속에서 단물을 쪽쪽 빨아대는 개미들의 끈적이는 뒤엉킴과 여기저기 벌겋게 발라진 고추장 땟물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전선들.

그리고, 발에 치이는 쓰레기 더미들..

그건 마치 잔혹한 상처를 방치해둔 주인장의 비열함을 일제히 까발리는 난장판이었다.

'이런 제기랄'

'욱'하고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애써 누르며 철문을 확 열어 제쳤다.

하지만, 일말의 기대치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눈 앞의 장관에 그만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신발장에선 빠끔히 고개 내미는 빚 바랜 신발들이 주인에게 버림 받은 몰골로 굴러 다녔고,집안 집기들은 제 설 자리를 잃고 거실에서 바둥 거리고 있었다.

 씽크대엔 덕지덕지 발라진 기름때가 반질 거리고 있었고, 베란다엔 아직 다 먹지 않은 간장독이 턱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뱀 처럼 또아리 틀고 앉아있는 기다란 호수.

마지막 시선에 꽂힌 것은  경악스럽게도 화장실에서 부끄러움도 사치스러운지 그녀가 열심히 밑구멍을 닦아 댔을 휴지통이 낯짝 좋게 웃고 있었다.

 

한 번도 보진 않았지만, 계약 당시 남편에게서 전해 들은 그녀의 모습에서 진작에 부족한 염치를 알아 차렸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나에게 굴욕감을 남기고 떠날 줄은 몰랐다.

살면서 내 흔적들은 최대한 예의을 다해 떠나야 함을 묵시적으로나마 알고 있을 줄 알았었다.

해서 나 또한 이사를 하면서도 말끔한 뒷처리를 마다 하지 않았기에 수북히 쌓인 잡념들의 흔적을 죄다  종량제 봉투에 밀어 넣고 왔건만...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의 치부를 다 들어내면서까지  황급히 떠났던걸까?

첫날부터 편치 않은 심기로 락스에 버럭 묻힌 화로 걸레질을 하면서도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면전을 대했더라면 욕지거리로 울분을 죄다 쏟아내 서로 부대낀 뒤 시작했음 한결 시원 할 터인데...

그녀가 돌보지 않은 더러운 집안의 흉터를 락스로 지우고, 빨고, 다시 지우면서도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이 억울했다. 언제쯤이면 말끔한 내 집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걸까?

닷새를 그녀를 시기하며 보냈다. 그 시간 속에서  화장실에 남겨졌던 그녀의 마지막 욕정을 더운물로 빠득빠득 더 열내며 씻어 내렸다.

집안 가득 풍기는 락스에 취해 쓰러져 포기하고픈 생각이 수시로 내 속을 차고 일어났지만,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버리고 싶었다.

혼미해진 잠결 속에서도 일에 질려 버려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도 온전한 형태가 갖추어져 있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의 흔적과 아이들의 체온이 집을 변화시키고 있다. 기름졌던 씽크대가 하얀 바탕으로 변했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는 100리터 봉투 석 장을 버려서야 해결이 되었다.

 

이제사 숨돌리고 생각해보니 그간 살면서 눈에 보이는 흔적보단 내 말과 행동이 실수로 저지른 그래서 더 치유하기 힘든 흔적이 더 많았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십 번의 걸레질과 락스로 해결이 되지만, 내가 입힌 마음의 상처를 앉고 살아가는 이들에겐 그 어떤 것으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은 얼룩임을 깨닫게 된다.

다 내 맘 같지 않은 어긋남이기에 부딪히고, 깨지고 ,살을 후벼파는 아픔을 줬던게다.

쓰레기를 버리 듯, 상처난 맘을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주 편할 순 없지만 조금이나마 한 발짝 다가서는 진실 된 미안함을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

내일도 모레도 락스에 취해 지워야 할 얼룩들이 많지만, 속살 드러내는 깨끗한  실체가 보여지기에 힘들어도 걸레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쓰레기를 버리려 가면서 이젠 남들에게  상처 주는 것에 인색하자 다짐 해 본다.

그네들도 필경 어디에선가 상처난 흔적으로 뒹굴고 있을테니까...

이젠 그녀를 용서하려 노력해본다. 어딜가나 소홀한 이가 분명 있을 것이고,  나 또한 미쳐 알지 못했던 무성의가 다른 누군가에게 비쳤을테니까. 나도 그녀 앞에서 당당하게 내 놓을 삶은 아니 었으니까. 어쩜 그 업이 고스란히 겹쳐서 지금 내가 힘들어 하고 있는지도.

그래, 좋게 생각하자. 말끔하게 해서 손해보진 않으니까.

락스를 쥐며 음악 볼륨을 높히는 손길이 좀 가벼워 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