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밤 내린 비로 숲은 해맑은 연두빛입니다.
여백 없이 녹음으로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
창 밖에 여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운동장엔 달리기하는 사람, 산등성이엔 뒤늦게 피어난 철쭉.
참으로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베란다로 나가 봅니다.
어제 사온 야생화랑 피망이 그림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 동네 시장 나들일 갔다가 고추모종을 팔기에 베란다에다 심어 볼까 하는 생각에 다섯 포기나 샀습니다.
한 포기 200원, 애들 껌 값도 안 됩니다.
성질 급한 나는 어서 고추가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꽃이 핀 걸로 샀습니다.
쓰레기 분리 수거장에서 누가 내다 버린 플라스틱화분을 주어다가 고추를 심었습니다.
화초 기르기에 관심이 많은 언니가 아파트 화단에 깻묵을 묻어둔 것이 있다며 손수 퍼다가 화분에 부어줍니다.
아무래도 영양가 풍부한 거름이 좋겠다 싶어서 부삽으로 듬뿍 떠다 부었습니다.
물을 주고 며칠 지나니 하얗게 핀 고추꽃이 누렇게 시들더니 뚝뚝 떨어져 버립니다.
처음엔 물이 모자라나 싶어서 줄줄 부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거름이 너무 독해서 꽃이 다 떨어져 버린 모양입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더니 이 말을 고추모종을 통해 깨닫습니다.
시들시들한 고추모종이 며칠을 기다려도 회생기미가 보이질 않기에 모종을 뽑아내고 미련 없이 흙을 화단에 도로 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흙에서 통통하고 희멀거레한 것이 꾸물꾸물 기어다닙니다.
무엇이냐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구더기입니다.
왠지 며칠 전부터 똥파리들이 방충망에 윙윙거리며 날기에 창문을 통해 날아왔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똥파리도 깻묵의 단내를 알고, 깻묵 속에다 알을 숨겨 두었나 봅니다.
꼼지락거리는 구더기를 피해 오마나 하면서 얼른 도망을 쳤습니다.
어린 시절 통시에서 보던 구더기.
온갖 사물들의 어린것은 귀엽더구만 이 놈의 파리 애벌레(구더기)는 도통 정이 안 갑니다.
집에 와서 남은 화분 하나에도 파리약을 쳤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나니 하루살이를 비롯한 파리들이 도통 보이질 않습니다.
거름을 적게 주어 살아 남은 고추 포기에 아기 손가락 만한 고추가 세 개 조롱조롱 매달려 있습니다. 어찌나 신기하든지 아침저녁으로 내다보는 재미로 삽니다.
어린 딸도 신기한지 베란다에 나올 때마다 화분에다 물을 줍니다.
식물을 기르는 것이 이렇게 소록소록 재미나는 일인 줄 새삼 깨닫습니다.
어쩜 이렇게 신기할까요?
손에 풀물이 묻어나도록 노동을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사방이 콘크리트벽이지만, 푸르른 들판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비록 가진 것 없으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