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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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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사랑-빙우-


BY 빨강머리앤 2004-04-22

이 영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영화(?), 아니 내가 본 최초의 우리나라 산악영화였다.

산을 매개로 만난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이 맺어준 산과의 인연이 빙우의 기본 얼개다.

대학 선후배 사이인 경민(김하늘)은 유부남 중현(이성재)을 사랑한다.

이 이루어질수 없을것 같은 사랑이 영화에선 너무나 쉽게 이루어 진듯해

영화를 보면서도 의문이 갔다.

선남선녀의 사랑에도 밀고 당기고 감정에 빠지는 단계가 있는 법인데

이 위험하고도 비밀스런 사랑은 경민의 감정상태가 몇번 전달되는 얼마후

곧바로 선배인 중현과 동거에 들어가는 단계로 발전을 한다.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으로 봐서 이장면이 그닥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유부남을 사랑하는 대학 새내기 경민의 감정을 너무 절제해 버린 나머지

관객들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게 설정해 놓은것 같다.

이 둘 사이에 경민의 어릴적 남자친구 우성(송승헌)이 끼어든다. 경민과 중현,그리고

우성은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고 중현과경민의 동거를 모른채 우성은 경민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중이다. 이들은 또한 산악회 회원들로서 산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기도

하다. 중현은 아시아크라는 빙산을 오르다 친구를 잃은 산에 대한 아픈기억이 있다.

그래서 인지 그의 이미지는 시니컬하다. 경민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에 애써

무심한 듯한 이성재의 연기는 참 편안했다.  반면 오랫만에 영화에 출연한 송승헌은

잘생긴 외모만 드러날 뿐 외모와 연기가 따로 노는 듯해 아쉬웠다.

 

아시아크라는 빙산은 이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다.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아시아크 이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아시아크는 오래

화면속에 비춰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해 산을 오른던 곳도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을 한곳도 아시아크라는 빙산이다.

영화속에서는 알래스카에 있는 산이라고 나오는데 '아시아크'라는 산은 실제로는

없는 산이라 한다. 영화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인것이다. 경민이 읊조리듯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수 있는 곳'으로 형상화된 아시아크는 사랑에 관한 유토피아

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는 로키산맥에서 이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하지만,영화를 찍기위한 배우들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만들어진 산악영화인

'빙우'는 안타깝게도 지루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롱테이크 기법이 너무 자주 사용되는

까닭이다. 대체로 빠르게 전개되는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은 내게도 빙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인내를 필요로 할 정도였고, 빙산을 오르느라 고생했을

배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잊은채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대개의 한국영화들이 영화시작만 거창하게 하고 끝에가서는 흐지부지 되는것 같다고

한국영화를 비평한 평론가의 말을 귀담은듯한 이 작품은 영화처음 부분은 무지

지루하게 흘러 간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탄탄한 시나리오와 회복되는 송승헌의 연기

그리고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김하늘과 이성재의 연기를 만나게 된다.

경민의 중현에 대한 사랑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중현이 유부남이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할바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내곁에 없는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산이 좋아 내가 좋아?'라고 묻는 중현에게 경민의 대답이 그렇다.

'당연, 산이지. 산은 항상 거기 있고, 보고 싶은면 언제든  볼수 있고, 만지고 싶으면

내맘대로 만질수도 있고, 나한테 화도 안내고 , 변함 없고...'

사람이니까, 산 같을수 없었는지 목숨처럼 사랑한다던 두사람에게도 위기가 온다.

불륜일수밖에 없는 두사람의 관계가 비끄덕 거린다. 경민은 이 숨어서 하는 사랑이

너무 감질맛나고 떳떳하지 못한거 같아 싫다. 중현은 경민과 지나치게 가까워 지는것이

두렵다. 아내가 있는 중현은 이제 사랑은 경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둘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다.

뭔가 미심쩍으면서도 중현과 경민의 사이를 눈치채지 못한 우성은 경민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경민은 번번히 우성에게 야박하게 대한다.

 

영화는 회고와 현실을 오가며 진행된다. 중현과 우성은 아시아크를

등반하던 중 도난사고를 당한다. 산악회 동료들과 떨어져 두사람이

한조가 되어 등반을 하고 있는데 얼음비(빙우)가 쏟아져 사고를 당한 것이다.

중현은 다리를 크게 다쳐 옴싹달싹 할수가 없다.

다행히 아무이상이 없는 우성이 눈속에 묻힌 중현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낸다.

기상악화로 베이스캠프와의 연결도 두절되고 중현과 우성은 설산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고립된 두사람은 한 여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경민과 사랑을 나눴던 중현의 기억과 경민에 대한 짝사랑으로 가슴이 아팠던

우성의 기억이 엇갈리며 마침내 중현과 우성은 자신들의 기억속에 있던

여자가 경민임을 알게된다. 

중현은,유부남 이기 전에 한남자를 사랑했던 경민이 자신의 사랑니를

찾기 위해 맨손을 불구덩에 넣던 중현을 위해 자일을 끓고 천길벼랑으로 떨어져

죽었던 장면을 무덤덤하게 이야기 한다. 바로 그들이 조난당한그곳, 아시아크에서.

나는 비로소 그장면에서  이 영화가 산악영화이기 전에 사랑영화였음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를 희생하는 눈물겨운 사랑,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스스로 자일을 끓고 선택적자살자 역활을 했다는 것에 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악영화이기에

그런 극적인 장면이 어울렸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경민을 그렇게 떠나보낸

중현은 비로소 자신의 사랑이 그곳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중현은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수 있을것 같은'아시아크로 등반을 계획을 했던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고 우성은 눈물을 흘린다.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환도 아니고 중현에 대한 울분에서도 아닌 경민이 이루려고 했던 힘든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린다. 우성은 결심한다. 아시아크에서 두사람을

다 잃을수 없다. 경민의 죽음또한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니 분명코 중현을

살리고야 말것이다. 밧줄로 중현을 묶고 자일을 연결해 썰매를 끌듯 산을

내려가는 우성의 행보가 고행자의 그것만 같다. 힘들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 중현의 호흡도 시나브로 엷어져 간다.

지친 우성이 마침내 쓰러지고 중현은 마지막 힘을 모아 우성과 연결된 자일의 고리를

끊는다. 경민이 중현을 위해 자일에 연결된 밧줄을 잘랐던 것처럼. 두사람 모두

희생시킬수는 없었기에.  경민을 추억하는 사람 하나는 이 세상에 살아 숨쉬어야

하므로... 다시 몸을 추스린 우성이 중현에게 다가간다. 이미 중현의 목숨을 끓어져

있다. 우성은 절망하며 눈속에 얼굴을 묻는다.

멀리 노란색의 구조용 헬기가 보이고 빙우가 몰아쳤던 아시아크는 무슨일 있었냐는듯

고요하고 평화롭기 까지 하다. 설원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단조로운

곡조의 음악이 흐르며 엔딩크레딧이 오르는 동안 아시아크는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아시아크는  잃어버린 사랑을 찾으러 나섰던 두사람, 경민과 중현을

따사롭게 품어 줄듯 넉넉하고  평온했다.

산악인 커플이 있었다. 빙산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조난당한 여자가 사십년이 흐른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스위스의 어느 빙산이었는데 그사이 빙산이 많이 녹아 있었고,

이제는 할머니가 된 여자는 그곳에서 사십년전의 모습 그대로 누워있는 사랑하던 남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설산을 오를 만큼의 패기를 갖지 못한 나는 이 전설같은 이야기에 그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문득, 빙우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영화를 보며 불현듯,

신문에서 읽은 스위스의 빙산에서의 일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