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봄이 오려나 했더니 창밖엔 벌써 목련이 웃고 있었다.
단아하고 청순한 미소는 언제보아도 돌아가신 엄마의 얼굴이구나.
푸르고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면 '나 언제 여기까지 왔나' 싶고
'참 힘든 언덕을 잘도 참고 넘었네'하고 스스로 바보처럼 웃는다.
요즘 해맑은 젊은이들 처럼 도전에 응전할줄도 모르고
그냥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묵묵히 가려니..하고 저항도 별로
하지 않았다.
벌써 남편과 한세월을 보낸지 이십오년이 되었다.
그는 퍽이나 나를 아끼고 배려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9대독자집의
장남이었고,육남매의 우상이었으며 부모의 미래였다.
그래도 겁없는 나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하나로 그 도전의 문을 밀쳤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부터 고난은 시작되었다. 별로 부자이지 못했던 친정으로 부터 가져간 혼수는 시어머님이하 시누이들의 가십거리가 되어 언제나 내 뒷통수에 날아 꽂혔지만 귀머거리인양 못 들은척 하고 손위 시누이들의 비위를 맞춰갔고 그것이 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할때까지 그 질투와 원망과 나로부터의 갈증은 끝이 없었다.
혼전부터 다니던 직장은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 할 무렵에야 그만둘수가 있었다. 남편의 직장이 자주 옮기고 망하는 바람에 경제적인 문제가 힘에 부쳤고 시댁에도 돈을 보내야 했으며 내아이의 우유값과 집없는 설움조차도 한시라고 해결해야 한다고 억척스럽게 직장을 다녔다.
그런 생활의 이중고통을 껴안고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은 마마보이처럼 자기 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살았던 남편이었지만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은 변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열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맏며느리라는 이름은 누구나 알 듯 얼마나 큰 죄를 지은 자만이 탈 수 있는 직함인가..
시어머니는 어느덧 팔십을 넘어 구순이 다되어 가도록 대차고 고집스러운 성격과 왕비병을 버리지를 못하시더니 치매라는 선물까지 내게 안겨주셨다. 하루도 편치 못한 생활 속에 한숨과 눈물이 배어나오지만 그것때문에 나는 그냥 주저앉을 수 없었다.
나를 지켜보는 나의 아들들이 어느덧 너무 사랑스럽고 대견하게 잘 커있었고 또 나를 떡하고 찬 바람을 막아주겠노라고 나서는 모습이 가슴 벅찼지만 목까지 메어 오는 듯한 고통때문인가 든든함보다는 왠지 슬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내게는 손아래 동서가 하나 있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서로 연락을 안한지가 일년여가 지났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고된 시집살이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아이들과 남편 봉양을 잘 하며 살았고 나와도 친자매처럼 지내며 힘든 시집살이와 시누이들과 갈등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잘 넘길것인지 의논해 가며 고난의 세월을 그리 어렵지 않다고 느껴가며 살아갔다.
무엇이 문제였지조차 지금은 기억도 히미한 일들 때문에 그녀와 나는 틈이 생긴것을 직감했고 나는 그것을 풀어보려 여러번 솔직한 대화를 나누기를 원했지만 나보다 다섯살이 위인 그녀는 코드가 안맞는 것같다는 표현을 하며 나의 이런저런 섭섭함을 말했다. 하지만 난 그때 어머니와의 엄청난 스트레스로 하루하루를 고통속에서 살던 때였고 그와중에 제사와 큰 일을 거의 나의 몫이였기에, 나의 고통을 이해하며 나누어 감내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을 애원했지만,이미 여러가지 오해와 섭섭함을 가지고 있었던 시동생과 동서는 적극적인 모습을 전혀 찾아 볼수 없었다.그 사이사이 시누이들과의 분쟁도 산재 중이었고...
나는 외쳤다. 그런 마지 못한 행동과 제사조차 참석지 않는 시동생의 모습을 보고 동서도 전을 부침네 하고 오후 늦게나 오는 일은 이제 하지마라고...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까지 안될거라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 뭐 하나 덜어낸 느낌인것 같이 시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내게는 든다.
그래. 어짜피 하는것 혼자 하자.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밀고 왔지만
후회도 되기도 하고 어쩔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외롭게 운명에 도전하듯 싸우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업이라면
웃으면서 해 보자. 힘들 지만 외롭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길이 어짜피 나만이 가야할 길이라면 노래라도 부르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하고 혼자 되뇌이고 되뇌인다.
막내 시동생은 언제나 돈이 궁한 처지어서 정신없는 어머니를 붙들고서라도 돈타령을 한다. 이해할수 없는 것이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는 끝없는 용서와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사를 하다 망해도 좋은 쪽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시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장만해서 또 뒷돈을 대 주신다.
그런 좌시된 상황을 십수년을 반복해 온 터라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혀를 내두르며 손 젓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막무가내식의 요구로 온 집안은 끝없이 끓는 가마솥 속같은 열기 속에 살 수 밖에 없다.
철없는 그 시동생이 어제 전화를 걸어 돈얘기를 하길래 돈을 줄 수 가 없노라고 잘라 말했더니 작은형이 그러는데 집안의 불란과 형제간에 우애는 다 형수가 농간을 부려 이렇게 된거라는데 그게 사실인가보다며 이런저러 악담을 해 댔다.
나는 눈앞이 노랬다. 손은 벌벌 떨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보던 책을 집어던져 놓고 허망하고 안타깝게도 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이 된 것에 분노가 뒤엉켜 산고를 치루듯 온방을 헤매며 울부짖었다.
이것이 인생인가.
어두어지도록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눈을 천장에 고정한채 있다 시어머니의 저녁상을 보고 또 드러누워 버렸다
남편..
그도 나의 얘기를 듣고 불 같은 분노를 삭이지 못하더니
차라리 이런 끝맺음이 마음이 편할테니 진정하라며 다독였다.
그러던 그는 새벽 두시가 넘어서 술에 잔뜩 취한채 돌아왔다.
동기간들이 왕따시켜버린 불쌍한 그를
나는 이렇듯 바라보며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가.
아니면 언제나 처럼 이쪽저쪽 집에 전화해서 끝없는 용서를 빌고 또 빌어어야 하나.
아니다.
난 또 다른 도전을 할 것이다
그들의 생활양식을 쫓기에 너무 지쳐버렸고 이제는 나의 그런 모습도
내가 싫다.
그들이 내가 싫다면 싫으라지, 나도 당신들이 싫으니까..
이 명답을 내어 이렇게 적기까지 이십오년이 흘렀다.
누구에게도 책망받는다는것이 정말 두려웠었는데 나이가 내일모레면
오십이 다 되어가지고서야 그 끈을 놓으려고 한다.
남이 보면 어리석은 삶이 었다고 할런지 모르지만
난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이젠 내 삶의 방식을 바꿔도 그리 흉되지 않을거라고
소리내어 말해 보지만
먼 곳을 응시한 채 아무말 없는 그이의 얼굴을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지려고 한다
약한자여...
어리석은 탓인가...
외로운 메아리는 더욱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