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출근 전쟁을 치뤄야 하는 월급쟁이들에겐 휴일이란 가뭄의 단비같은 것.
더더군다나 황금 연휴는 더 말 해 무엇하랴...
다음날 아침 시끄러운 '꼬끼오~' 알람 소리에 맟춰
억지로 감긴 눈을 뜨며 일어나야 할 부담도 없으려니와 허둥 댈 필요도 없으니
이 얼마나 여유롭고 편안한 일인가.
갑자기 너무나 한가해 져 무언가를 해야만 하루 해가 무사히 지날 것만 같은데
앞으로 이틀간을 무위도식하며 놀고 있을텐데 그 전야를 그저 무의미하게 보내버리기엔
너무나도 안타까운 저녁.
무슨 건수 하나 생기지 않나 곰곰 머리를 굴리는데 ' 삐비~삐비~'문자 들어 오는 소리.
옳거니!!
드디어 뭔가가 생기려나 보다.
이십 년 가까이 내 밑에서 일 하던 직원이 이년 정도 타지로 나가 있었는데
다시 내 곁으로 오고 싶다고 SOS를 해 와 흔쾌히 승락하고 대기 중인데
문자를 보내 왔다.
때는 이 때다 싶어 답글을 보냈다.
오늘 밤 한 잔 어때???
베리 나이수~란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올 한 해 동안 정말 열심히 잘 해 보자고 격려 겸 당부의 말을 건네고
모처럼 우리 또래만의 분위기 있는 노래를 불러보자고 의기 투합하여 노래방으로 향했다.
여정, 해후,천상재회,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아모르...등등의 애창곡들이 줄 지어 나오고
나이 먹으면서 더 좋아하게 된 '서른 즈음에...'까지
평소엔 세대가 다른 후배 동료들로 인해 불러 볼 수 없었던 노래들이 연이어 나온다.
목청 높여 소릴 질러 댔으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집에 들어 오니 남편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는지 고요하다.
목이 말라 뭐 먹을 게 없나 찾아보려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냉장고 문을 여니
커다란 플라스틱 병의 포도쥬스가 눈에 들어 온다.
지난 가을 초등 동창 친구가 직접 담궈서 보내 준 쥬스인데
여지껏 먹지 않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모양인데 왜 이제서야 눈에 띄는건지...
피로회복에도 좋고 미용에도 좋다는 포도이니 오늘밤엔 저걸 마셔볼까나...
뚜껑을 아무리 열려고 낑낑 대도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내가 원래 손목이 약해 힘이 없어서인 모양이라 여겨 온 몸의 힘을 손목으로 집중시켜
이를 악 물고 뚜껑을 돌렸다. 아니 비틀었다.
그래도 한동안 전혀 꿈적도 않더니 어느 순간 스르르 열리는가 싶더니...
펑~!!! 쏴~~~~
았!!! 이게 무슨 폭발음이얏!!!!
갑작스런 폭발 소리에 넋이 나가려는 순간,
"뭐해?"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남편의 놀란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아냐...아무 것도... 쥬스 마실려고..."
어둠 속에서도 1.8리터들이 포도쥬스가 일순간에 사방으로 튀어 나갔단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동안 너무 오래 먹질 않아 병 속에서 가스가 찼던 모양이다.
뚜껑을 갑자기 여니 포도쥬스가 마치 폭발물처럼 일시에 튀어나가버린 것이다.
이삿짐도 채 풀지 않은 새 집 하얀 벽에 어둠 속에서도 얼룩진 것들이 쉽게 눈에 들어 온다.
부랴부랴 수건을 찾아 하얀 벽부터 닦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냥 잠이나 잤더라면 지금쯤 꿈나라 갔겠네...
식탐이 심해서리 이 고생이구만...
후회해 봤댔자 이미 늦은 일이지만 포도쥬스 한 통이 다 쏟아져 나갔으니
그걸 찾아 닦아 내려면 한참 걸리게 생겼고 깨끗이 닦일려나 미심쩍어 속이 편할 리가 없다.
"아니...안 자고 뭐하는 거야???"
부시럭대는 소리에 남편이 한 마디 더 얹는다...
"으응...대강 좀 치우고 잘려구...어서 자..."
남편이 그 현장을 보면 아마도 조용할 성 싶지가 않아서
소리없이 흔적을 없애려니 더 부아가 치민다.
이그...좋게 그냥 잘 것이지...이게 뭐야...
수건 두 개를 짜고 닦고 또 짜서 닦아도 제대로 되는 거 같지가 않다.
불을 켜자니 남편이 깰 거 같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고
이제 더 이상은 팔이 아파서도 못 하겠고...
에라...모르겠다...이 정도 했으니 내일 아침에 일어 나서 다시 하지 뭐...
술 기운 때문에 걱정도 잊고 잠은 잘 들었던가 보다.
날이 밝자 어젯밤 일이 생각되어 벌떡 일어 났다.
억지로 눈을 비비고 일어 나 냉장고 앞에 와서야 나는 입이 떡 벌어지고야 말았다.
세상에...세상에나...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새로 바른 하얀 벽지 위에 색깔도 선명한 청보라빛 포도 쥬스가 불규칙한 무늬로
사방에 얼룩져 있는 게 아닌가.
냉장고와 에어컨이야 금방 쉽게 닦아지겠지만 그 뒷 벽면의 무늬도 선명한 얼룩들...
벽지의 얼룩은 이미 말라 버린 액체라서 쉽게 닦여질 리가 만무하고
한 켠에 놓인 행거 위의 남편과 내 옷엔 설탕기까지 가미된 쥬스의 찌꺼기가 말라 붙어
도저히 증거물을 없앨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큰일 났다...
잽싸게 다시 수건을 가져 와 락스물을 뭍여
팔이 아플 정도로 힘껏 닦아 보지만 어림없는일...
이미 새로 도배했던 벽지의 얼룩은 닦고 또 닦느라 벽지가 닳아 너덜거릴 지경이다.
어떻게든 표가 안 나게 하려고 혼비백산하여 여기저기 얼룩을 찾아 열심히 닦느라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 될 즈음에야 남편이 잠에서 깨는 모양이다.
잽싸게 동작을 멈추고 아무 일도 없는 척 칫솔을 들고 세면장으로 향했다.
그리곤 순간적으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주방에서 아침을 챙기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 온다.
"아니...대체 쥬스를 어떻게 한 거야?
내 옷에 다 튀어 가지고 죄 얼룩 져 있잖아. 한 번 가 봐 봐.
당신 옷이랑 내 옷 다 버렸던데..."
아뿔싸...맞아 ...얼룩 닦다가 나온 거였지...
이젠 건망증까지 생긴 모양이다.
남편은 우선 자기 입은 옷만 대충 닦은 모양인지 그대로 나가는데
뒤 이어 따라 들어 온 아들넘이 소릴 꽥 지른다.
"엄마!!!
또 무슨 사고를 친거야???
방에 한 번 들어 가 봐. 난리가 나 있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얘, 가만가만 말 해. 다 들리겠다...
엄마가 쥬스 좀 마시려다 그게 폭발했단 말야...
안 다친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구마는..."
술 마시고 악 쓰느라 목이 너무 말라서 꼭 그 쥬스를 마시고 싶었단 말은
차마 아들넘에게 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에...
엄만 그 먹을 것 때문에 꼭 사고를 친다니깐...
냉장고에 있는 귤이나 먹지 뭐 하러 굳이 포도 쥬스를 마시려했느냐구요~...
암튼 문제야 문제... 먹을 욕심 때문에 꼭 사고를 쳐요...꼭..."
입이 백 개여도 할 말은 없지만서도... 그러면 난 뭐냐구요...
쥬스는 한 모금도 못 마시고
한 밤중에 남들 다 잠 들어 있는 깜깜한 방 한 쪽 구석에서
포도쥬스 파편들 닦느라고 꼬박 몇 시간을 몰래 고생을 해야 만 했던 제 꼴은 뭐냐구요...
앞으로는 정말 포도 그림도 보기 싫을 것 같습니다...그려...ㅜ.ㅜ
이렇게 휴일 하루는 그냥 망친 거 같구먼요...
에구...에구...
그냥 푹 잤더라면 팔 고생은 안 했을 것을...
냉장고 뒷 벽면의 아직 채 덜 닦은 얼룩이 제 마음에 얼룩져 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