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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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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기억(2.빨간 운동화).


BY 마야 2004-02-28

빨간 운동화.

 

기찻길 옆 큰 신작로엔 먼지바람 일고,

벼가 누렇게 들녘에 넘실대면,

코스모스는 하늘을 향해 내 키를 덮고 하늘하늘.

솜구름 뭉게구름 둥둥 옥색 하늘을 떠돌면,

" 영치기 영차!.

  영치기 영차!.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아이들의 까치같은 함성이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서 빨간 고추가 멍석에서 가을볕받아

더욱더 붉어지듯이 우리들의 이마엔

어느새 송글송글 땀방울 베어

붉어진 얼굴엔 복사꽃 볼우물도 사라졌었다.

 

가을걷이 잠시 뒤로 미룬,

농부 아버지 어머니들.

손자 손녀 재롱보러 나들이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들.

일곱 마을의 온 동네 아이들 다 모여 동네 잔치하듯,

풀라타너스 너울잎이 나풀거리는 그늘 아래

하얀 천막으로 볕을 가리고 들어앉은 동네 어른 응원단들.

그렇게 가을 운동회는 무르 익어갔었다.

 

전교생 다 합쳐 이백 사십명도 안돼는 아주 작은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엔,

흰머리띠 두르고 백군팀과

파랑머리띠 두르고 청군팀이 모여

희뿌연 먼지 바람을 일으켰었다.

 

홍어회,막걸리,돼지고기 고추장에 볶고,

돼지 머릿고기 갓담근 포기김치에 싸서 한입.

햅쌀밥 지어 가마솥째 가져온 학교 뒷마을

사람들,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권했었다.

"선상님도 잡숴 보시요~."

"아고~, 김선상님!."

보쌈 싸서, 선생님들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들의 손길이

잠시 멈추면.

일곱 마을 두 팀으로 쪼개서,

청군팀!.

백군팀!.

그렇게 아이들의 꼬리에 어른들이 모여했던,

전체 줄다리기로 마지막 승패가 갈렸었다.

그날은 청군 승리!.

 

노점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빨간 운동화가 예뻐보여서,

어린 딸 얼굴과 그 노파의 손끝에 힘을 주고 싶어서...

아버지 어머니 허락없이

낫 갈러 나간 장날 사들고 오셨던,

내 빨간 운동화!.

흙이 묻을까, 백구가 물어 뜯을까 두려워

머리맡에 두고두고 한 번도 신지 않았던

내 빨간 운동화!.

'이 고무신 떨어지면, 신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아끼고 아꼈던 빨간 운동화를

아이들이 하얀 체육복에

하얀 운동화 신던 그날 신을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나온 내 눈에,

디딤돌 위에 올려 놓은 하얀 내 운동화가 없어졌고,

뒤뜰에서 뒹굴던 백구와 누렁이가 질겅질겅

아주 잘 씹어 놓아,

신을 수 없어서...

아이들이 내내

내 운동화를 쳐다 볼 때는 어색해서

하늘 한번 처다보고,

다시 운동화를 쳐다 보았었다.

 

"너는 왜? 빨간 운동화야?"

"강아지가 내 운동화를 물어 뜯어놔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고

호르라기 소리에 묻혀 운동회가 시작 돼었다.

청군이 이기고,

할머니 할아버지 어깨 춤이

징과 꽹과리 장고 가락에 덩실덩실

너울그릴즈음이면, 하얀 운동화도 쟂빛.

내 빨간 운동화도 쟂빛으로 먼지 흡뻑 뒤집어 쓰고 있었다.

 

"이젠, 누구도 널 못 알아 보겠구나!.

 빨간지, 하얀지 잘 모르겠는걸..."

이라고 나는 중얼 거렸었다.

 

코 밑엔 흑범벅.

입가엔 김치국물 자국.

이빨 사이엔 고추가루 낀

하얀 이들이 깔깔 웃을때.

가을 해가 강뚝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놀을을 몰고 오면,

저마다 아버지 어머니 손 붙들고,

상으로 받은 공책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갔었다.

 

아직 흥겨움 남은 운동장엔

마지막 놀음굿같은 어른들의 잔치가 이어지고,

국민학교 운동회가

어른들의 동네 잔치로 뒷마무리 지어질 때면.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모두 남아,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다시 한번 밤 운동회를 열었었다.

달빛이 둥실 밝아 질 때까지...

 

 

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