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 찌꺼기통 좀 잊지말고 비워 놔줘요, 꽉 찼어요."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하면서도
어린아이를 물가에서 놀게 놔두고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마음이 편치를 않다.
몇번씩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온종일 혼자 집에 있을 남편에게 할일들을 주입 시키고 나가긴 하지만
그중에 몇가지 일들을 해 놓을지는 차라리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할 거였다.
결혼생활 이십칠년이 되도록 그 사람은 늘상 집안 일에 서툴렀고,
어쩌다 한번쯤 큰맘먹고 나를 편하게 해준다고 해 놓은 일은
곱절의 일을 보태 놓기가 일쑤였다.
그날,
남편의 조직검사 결과를 알기위해 병원에 갔던날,
의사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는 커다란 둔기가 되어 나를 내리쳐서
한참동안 할말조차 잊은채 앉아 있게 만들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몇분의 시간동안
몇년후의 시간들이 슬라이드처럼 서걱거리며 지나가는데
그안에서 주인공인 늙은 여자를 남들이 과부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어디에서나 홀로서 있는 여자의 얼굴엔 온기라곤 없어 보이는채
늙으신 부모님들 치닥거리조차도 힘겨워 어쩌면 그분들 보다
더 먼저 늙어 죽어 가고 있는것 같기도했다.
커다란 남편의 손이 내손을 꼭 잡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재미없고 억수로 재수없는 슬라이드 화면들을
한참동안이나 더 봤을뻔 했다.
내시경 수술과 짧은 입원,그리고 다시 조직검사.
결과가 아주 좋다는 의사의 말.
삼개월 후에 다시 정기 검사.
의술을 그렇게 까지 믿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믿으려 노력했다고 하는게 더 맞을성 싶다.
그렇게 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병인데도 아직 원인 규명이 안된다는데
일단은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 했으니,
장삿군이랑 선생의 그것은 개도 안먹는다는 옛말이 생각나서
가게를 급히 정리했다.
아직도 가끔씩은 약한 마음을 보이는 남편을
반은 윽박지르기까지 하면서 강한체를 해 놓고는
차를 몰고 나오면서
밖으로 보이는 텅빈 논바닥에 앉아 깍깍 거리는 까치 가족들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하다.
"욕심은 한 없는것이니
내 능력 만큼만 생활하도록 하자."
가끔씩은 내 스스로가 놀랄만큼 편안하다가도
언뜻 스쳐 지나가던 불안스런 그림자는 아직 집에 안주하기엔 이르다고
큰소리로 고함쳐서 나를 흠찟 거리게 한다.
취미로 하는걸 일삼아 한다고 성가시게 들먹이는 남편을
온종일 시골집에 혼자 놔 두고는 낮시간을 화실에서 보내고
어른들이랑 저녁을 먹고 와 보니 불도 켜지지 않은집에 기척이 없다.
"어딨어요? 뭐해요?"
"여기~~~! "
창고 안에서 앵글을 끼워 맞추던 남편의 얼굴이
추워서 꺼칠한채로 편안하게 웃는다.
저녁을 챙기는 식탁앞에 당겨 앉아 하루를 얘기하는 남편의 모습이
꼭 숙제 해온 거 꺼내놓고 검사 맡는 어린애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