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둘 그 사이 나.
황룡강 가를 자전거로 약 삼십분 달리면.
강물이 나를 따르다가 뚝 끊어질 즈음 좌로 돌아 산 모퉁이
공동묘지를 가로 지르는 산길 시장로에 들어서서 오르막길
자전거 밀고 오르면 산 속에 작은 마을 있어서
그 마을 이름이 맥정.
보리의 목. 이라는 물이 귀한 동네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인터넷을 통해 만난 친구 큰돌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어머니가 "그렇게 배 차라고 발악 할 것 이면 차라리 날 죽여라~아!"
라고 스스로 목에 새끼줄을 묶고 악을악을 썼던 그날까지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유난히 아들을 선호했고.
유난히 가난을 탓했던.
어디 누구하나 부자가 아니었던 그 시절.
그 어머니는 딸 아이를 머슴처럼 부리다
그것도 양이 차지 않아 먹던 밥 그릇을 들어 마당에 던지기도
하고, 동생들의 탓을 모두 내게 돌려 두들겨 패기를 대수롭지 않게
일삼았던 그 기억들과 함께 지금도 그곳에는 작은 이름없는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명절 음식은 맛을 보지 않아야 조상님들이 들러 맛나게 먹고
떠난다고 음식맛도 보지 않고 이것저것 만들어
광에 쌓아 두었는데....
대식구 거느린 탓에 이곳저곳에서 아들 딸 몰려 와서
조카 손주 사촌 모두 함해...삼십명도 넘었던 어느 날.
제가 부엌에서 그 많은 아낙들-새 언니들. 언니.-다 재치고
저녘을 짓고 있던날.
나보다 어렸던 조카들과 동생 사촌들이 모여들어간 광이
이것저것 먹었던지 손떼가 탔던 모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일로 그날 제음식에 손을 댄 것이 나라면서
아무도 말일 사이도 없이 나를 뒤 뜰에서 두들겨 패기 시작하셨지요.
갑자기 맞은 매.
머리가 헝크러져 코피를 흘리는 나의 애처로운 모습이 안타까워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새 언니들이 나를 치마 폭으로 감싸줘도 그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마음이 쉽게 달아나질 않아서
모두 저녘을 먹은 이른 오후에 나는 그 대 밭을 가로질러 이름없는 무덤이
나란히 놓여있는 그곳으로 농약병을 들고 갔었습니다.
늘 내가 가장 쉬고 싶을때.
아무도 내가 어디있는지를 모르게 하고 싶을때.
살며시 책 한권 들고 갔던 그 무덤과 무덤 사이에 누우면
어머니의 포악도 어머니의 얼굴도 모두 사라져 날 안아주었던
그 무덤 사이에 누웠습니다.
병을 만지작 거리면서 그것을 마셔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생각하면 할 수록
내 두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은 소리 없이 목을 타고 셔츠를 적셨습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던 내 몸이 굳어지듯이
잠이 들었던지 누군가 나를 안아다 방에 뉘여주었던 분이 바로 아버지.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의 극에 달한 나의 광기를 어떻게 해 보지도 못 한채
늘 지켜만 보시다가 그날은 날 찿아 나섰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고 싶었던 미련스런
나는 열 살도 안되서 명태국을 아주 맛있게 끓였더니,
그때 부터 부엌 살림은 내게 다 떠맡기시고
가끔 부엌으로 나들이 나오시면.... 부뚜막의 검댕을 트집잡아 세수대야 물을
제 머리위에 함박 부으시고.
둘째 언니가 서울에서 사서 보낸 단추가 주루룩 달린 나의 원피스를 당신
화 못이겨 갈기갈기 찢어 놓고.
머리채 잡아다 몇번 나를 내 동댕이 치고 나면 씩씩 김을 뿜으며 앞 마당으로
나가 당신의 누렁이 쓰다듬다가 맛난 밥 준다고 부산을 떠셨었지요.
우등상을 타온들 칭찬을 한 번이나 받았겠씁니까?
공부를 잘 해 장학금을 받아온들 칭잔을 받았겠씁니까?
중학생이 되어 어머니의 구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아버지의
동의 얻어 홀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친구 영어 가르쳐 주고
공부 도와준다는 이유로 같은 반 친구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지요.
읍내에 중학교.
읍내에 사는 친구집에서 살게된 나는
그렇게 가족들이 아주 많은 대가족에서
태어나 외톨이 처럼 살기 시작할 때까지
어머니의 구박을 온 몸에 받고 살았었던
그 아버지의 대 밭 넓은 집은 나의 고햐이라는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습니다.
지금 이렇게 뚝 떨어져 살다 보니 모든것이 그립습니다.
지나간 기억들이 그래서 아름다운 것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학교 하교길에 코스모스 흐드러진 신작로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해가 지는줄도 모르고 꽃씨받아 챙기고, 꽃잎따서 머리에 꼿고 그렇게 놀던
어느날.
저녘을 해야 하는 내가 집에 없었으니...
당연히 어머니의 화난 얼굴이 앞마당 뒷마당을 오가며 저녘 밥을 짓다가
동구밖 내 얼굴이 보이자 악을악을 쓰셨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까마득히 잊은 저녘밥 짓기가 그제서야 머리속에
획하고 지나는 순간, 저는 온 몸은 이미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구밖 오솔길에서 집 대문까지 얼마나 멀게 멀게 걸어 들어서니
어머니의 첫번째 고함이 채 귓전에서 가시기도 전에 차가운 물 한 바가지가 머리
위에 쏟아지더군요. 그리고 숨이 턱 막혀 오는데 이미 어머니는 나의 목을 거머쥐고
마구 주먹으로 두들겨 폐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라는 나의 각오는
어머니가 머리끄댕을 잡아 당기고
나의 옷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하는 그 행동뒤로
아주 순식깐에 사라졌씁니다.
몸이 알몸으로 들어나고.
옆집 같은 초등학교 남자친구가 안스러운 눈으로 탱자나무 사이로
어쩌지도 못하고 나를 보고 있는것을 알때까지 나는
내가 절반이 나체로 알몸이 들어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나를 극구 당신이 낳았다는 주장을 늘 하시면서도
나는 늘 그 어머니가 계모임이 틀림이 없다고 언젠가 부터 믿었습니다.
단 한 번도 대들지도 거역하지도 않고
겨울이면 물퍼다 대식구 빨래하고.
새벽이면 먼저 일어나 새벽밥 짓고.
어머니의 잔소리가 싫어서... 일을 너무나 척척 잘 했던지, 동네에서는
효녀 났다고.
"공부도 잘 하고 저렇게 마음씨도 착하니..." 이런 말들이 늘 나의 뒷
꽁무니를 쫒아 다녔지만, 나는 그것이 모두 평화롭기 위한 나의 수단임을 늘
두 살 위 오빠에게 힘주어 말했었지요.
오빠며, 동생들까지도 어머니가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즈음.
중학 3 학년이 되고 그렇게 친구의 과외 선생이 되면서 집과 아니
그 어머니와 멀어지게 되었지요.
고교시절은 기숙사에서 장학생으로 지냈으니 집이 그리울 턱이 없었고.
아버지 가끔 내려오셔서 용돈 놓고 가시면 그 아버지 얼굴
정면에서 뵈면 그리울까 싶어서...기숙사 뒷동산에 숨어 버렸던 그 옛날.
어머니와 나는 인연이 아닌거야.
나는 어머니가 없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어머니를 잊었던 국민학교 오학년 이후
나는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를 그리워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뒷날 .
왜그렇게 내게 모질었는지 당신도 모르겠다면서...미안하다는 말을
제 작년에 처음으로 하셨습니다.
저의 무덤한 답은.
"건강하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사과 해 주셔서...업 이었나보지요."
누렁이 밥 줘라~
외가댁 나들이 가기전 어머니의 당부.
저녘밥 맛나게 지어라~ 마실가는 어머니의 당부.
느그 새 언니들이 뭘 만들지나 알간디...나가 봐라.
정초 설날 새벽에 날 발로 깨워서 부엌으로 내 보내시며 했던 어머니의 언동.
좋은 시어머니.
좋은 어머니.
열명의 자식들에겐 늘 좋은 어머니였던 그 같은 어머니는 저에게만큼은
늘 죽음의 사자보다도 더 잔혹했던 어머니.
유난히 좋아했던 김치찌게를 먹던 날 조금이라도 더 먹을라치면.
"저년이 오빠먹을 것도 안 남겨 놓고 다 먹는구만..."
그러면 등지고 밥을 먹던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상 위에 놓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다 먹은듯 소리없이 부엌문을 열고 나가 남은 밥을
어머니의 사랑스런 누렁이에게 부어 주면서...
"음...난 괜쟎다 너 다아 먹어라..."
유난히 자존심이 세서.
유난히 말이 없던 어린시절.
그렇게 나와 어머니는 아주 멀리 갈라 서게 되었었지요.
내가 당신 큰돌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공감을 했는지는 이미 이 이야기 에서
답을 드렸으리라 믿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의 누렁이.
나의 어머니의 누렁이.
개의 목을 끓어안고 울었다면...
저는 농약병을 어루만지며 죽음을 상상하면서 울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과거의 기억들이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의 가슴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지도
아니면...가슴을 읽을 수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마다 저는 피식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늘 건너편 친구의 어머니.
그 작은 초가 지붕에 사는 친구의 어머니가 정말 어머니 다움 어머니였다고
그 때도 늘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도 어젠가는 어머니가 되겠지요.
아마도 닮을 어머니가 없으니
저는 아마도 아버지 같은 어머니가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암 그래야지요.
저는 아버지같은 어머니가 나의 아이에게는 될 것 입니다.
지금도 그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그 넓은 대 밭 기와 집에 혼자 사시고 계십니다.
차라리 너무나 가나해서 그랬다면....어떻게 이해하기가 쉬웠을 텐데....
차라리 어머니가 몹시 나쁜 계모였더라면...이해가기가 더 쉬웠을텐데....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저는 저의 어머니가 생모인지 아니면 계모인지 잇달은 질문을
끊을 수가 없군요.
지나간 일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면, 서울의 큰댁에 얼마간.
둘째댁에 얼마간.
그렇게 즐거운 나들이 하시면서 지내실 껍니다.
저는 저에 대한 기쁜 일이 거나 슬픈일을 식구들 중 누구와도 나누지 못합니다.
아니 그러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저는 저의 가족의 이방인 이었거든요.
언젠가는 나를 늘 감싸 안아 주었던
그 이름모르는 무덤을 찿아 소주라도 한잔 올릴까 합니다.
쌍동이 무덤.
저에겐 어머니의 품속같은 그 무덤을 찿아가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