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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집-2


BY 리베 2004-01-29

  누구나 가슴 속엔 사막 하나쯤 갖고 있겠지만, 규모면에 있어선 어떤 사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드넓고 광대한 사막일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사막이라고 하기엔 아주 작은 모래더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막은.... 사막 자체에 절망하기 보다는 오아시스가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희망과 좌절이 교차되는 것일텐데.....

 

  내 가슴 속의 사막 하나 떼어낸 기분이 이렇게 홀가분하고 무거운 짐 하나 벗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들 줄은 몰랐다.

 죄사함을 받기위해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먼저 썼던 글과 지금 쓰는 글에도 어차피 내가 주인공인 나의 인생인데 어느 누구를 특별히 악역으로 등장시킬 이유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아직 희석되지 못한 아픔이 약간 남았을 뿐.

 

 

 내 사주팔자에 '돈줄이 말랐다'고 나와 있는지는 확인한 바가 없지만 내 또래에겐 거의 찾아볼 수없는 사춘기때의 지긋지긋한 가난과 함께했다.

 

 없는 집에서 그만큼이나마 자식들을 뒷바라지한 게 대단하다는 건 나또한 내 아이들 둘을 키우며 알고 있지만 기찻집에선 일곱자식 중 맏이 하나 잃고 나머지 자식들을 공부욕심에 못미치게 가르쳐 사회에 내보내고 거기서 다달이 나오는 생활비로 남은 자식들을 걷어먹이는 생계의 고리가 이어지다 내 나이 14살 되던 해엔 마지막 주자인 세째고모마져 결혼을 했고 그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한참 예민할 사춘기 시절을 더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게 보내야 했다.

 

사립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중학교 3학년 마치던 날 선생님은 조용히 날 불렀고 1년내내 돈에 시달려온 나로써는 무슨 일인지 알기도 전에 주눅부터 들어 있었다.

 

 교납금을 내지 않아 졸업이 안된다...........

 

 그 때 심정은....그냥 죽고만 싶다..라는 걸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돌아가신 아버지도...그저 세상물정 모르고 도피만 한 어머니도....아니, 멀리갈 것도 없이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내 자신이 싫어 잠깐 시간이 멈춘 그 때 그냥 흩어져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나마 적극적인 성격의 언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학교에 낼 돈은 차곡차곡 잘만 받아챙겼지만 드센 언니에 눌러 항상 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후로 악몽같은 고등학교 3년이 흘러가고 대학 원서 쓸 즈음....

 어차피 할아버지 손에 넘겨진 우리를 포기한 엄마와 연락이 닿았고 엄마와 결혼한 그 아저씨....우리의 대학등록금을 대준다...고 약속했던 그 아저씨는 애초에 그런 맘이 없었던 듯, 철저하게 엄마의 지출입 내역서를 매달 확인하고 하다못해 전화요금 고지서까지 확인하는.... 거의 의처증 환자 행세를 하고 있어, 그 눈을 피해 연락하는 것도 어려웠던 엄마는 이미 그 쪽서 낳은 자식들이 있기에..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살기 위해 푼푼이 모아놓은 돈을 내 대학 입학금으로 쓰라고 내놓으셨다. 이미 대학을 혼자 벌어 졸업하고 취직이 되어 있는 언니와 함께 살 전세집을 얻어주겠다는 말과 함께.....

 

 기찻집을 떠날 때....내 입던 옷들을 모조리 챙겨 그 집을 떠날 땐...다신 뒤도 돌아보지 않으리란 다짐을 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떠났다.

 사춘기 시절도 예외가 없이 모질게도 우리를 때리던 삼촌도 싫었고 무모한 자식 사랑에 그 폭력을 알면서도 할아버지께 들킬까봐 오히려 맞는 우리를 야단치던 할머니도 싫었고 주눅이 들대로 들어 사람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내 성격도 싫었고 구질구질하게 매일매일을 돈 걱정하며 지내던 내 어린 날이 싫어서 그 집을 그렇게 가차없이 떠났다.

 

......

 

......

 

  가장 괴롭고 힘들 때 북받친, 본능적인 귀소본능으로 결혼 후 난 -그리 길지 않겠지만- 기찻집에서 채 20분도 되지 않은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이 고향이지만 서울 생활에 지친 남편의 한계와, 평소 기찻집 얘기만 나와도 울먹거리는 내 감정의 공통분모로 고향행을 택했고, 덕분에 서울서 감정변화가 크던 첫째아이 육아스트레스와는 달리 비교적 안정적으로 둘째 아일 키우고 있다.

 

 그 기찻집엔....고3 대입원서를 쓰며 내 스트레스가 최고조 에 달했을 때...청소를 하라고 내 머리끄댕이를 휘어잡는 삼촌을 향해 집어던져 산산조각난 거울의 파편을 들고 차라리 날 죽여달라 울부짖던 그 때의 거울 대신...다른 거울이 내 추억처럼 평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기찻집엔 내 사막의 오아시스였던 할아버지가 아직도 그 흐뭇한 웃음으로 우릴 반기며 살고 계시고 추억은 아름답게만 기억된다는 진리처럼 내 기억 속의 기찻집도 그 어느 곳보다 편안하게 기억되고 추억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