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남 일녀, 육남매의 맏며느리.
시아버님이 독자이신 종손이나 다름없는 종가집 맏며느리.
시집 갈 때까지 고작 설거지 몇 번 해 본게 전부인 가사 이력...
딸은 구정물에 손 담구면 시집 가 고생한다시며 걸레질도 못하게 하시던 아버지.
오빠들 사이에서 공주처럼 멋대로 자란 천방지축인 계집애...
이런 내게 '맏며느리'라는 직책은 그야말로 숨이 탁 막히게 하는
주어진 역할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집안 살림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요,
마흔 다섯해를 친정어머니 보살핌으로 가사를 해결해 왔으니 더 설명해 무엇 하랴...
동서라도 있으면 그나마 더 나았을 지도 모를 것을
일찍 결혼 한 탓에 손 아래 동서 들어 올 때까지 팔년 동안 외며느리여야만 했다.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저 좀 더 일찍 가서 설거지 하나라도 도와 드리는 게 고작...
공부와 직장 일 밖에는 해 본 게 없는 며느리인지라
언니 같으신 젊으신 시어머니는 일찌감치 며느리에 대해 아예 기대조차 않으시고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손수 거의 일을 마쳐버리시곤 하셨다.
아마도 서투른 며느리에 대한 배려 이셨던 듯하다.
외동딸인 막내 시누이지만 시어머니는 가차없이 주방 보조일을 시키시곤 했다.
'너도 시집 가면 어차피 해 봐야 할 일이니 언니 도와서 함께 해라'
시누이와 나는 띠동갑.
그녀는 날 꼭 '큰언니'라 부른다.
정말 친동기간처럼 너무나 흉허물없이 지내는 올케와 시누이 사이...
철없던 새댁 시절에는 정말 시댁 가는 게 싫었다.
내가 잘 할 줄 아는 게 뭐라도 있어야 가서 주방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요술방망이처럼 금방 뚝딱 뭔가를 만들 수 있어야 신명이 날 터인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엉거주춤 있어야하는 게 고역이었고
또 행사 때마다 찾아 오신 친척분들은 한꺼번에 오시면 오죽 좋으련만
시도 때도 없이 오시니 낯가림 심한 성격으로 그 것 또한 만만찮은 스트레스였다.
명절 뿐만 아니라 시할아버님과 할머님 두분의 기일까지
그리고 가족들 행사, 생신 등 거의 한달에 한두번 꼴로 가야 하는 시댁.
시원시원하신 시어머님 성격과는 달리
윤리주임 선생님이셨던 깐깐한 시아버님은 사사건건 늘 트집이셨고
가족 모임 때마다 늘 분위기를 망쳐놓으시곤 하셨으니
자상하시고 딸 밖에 모르시던 친정아버지와 비교되어 정말 적응이 안되었다.
새벽녘에야 돌아 와 다음 날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는 나로선
외지에 떨어져 사는 동서네가 정말 부러울 지경이었다.
손윗 자리란 것이 얼마나 심적 부담이 큰 것인지 경험해 보지않은 이는 모르리라.
동서들은 개인적인 행사로 제사 중간에 빠져 나가도 별 말씀 않으시던 시어머님께서,
아니 우리보다 고작 이십여 분 걸리는 거리에 사는 동서는 어서 가라고 등 떠미시면서도
정작 내겐 늘 '맏며느리'자리의 부담을 주셨다.
"너 없으면 누가 제사 지내냐..."시며 부부동반 송년 모임에 연속 두 해나 불참케 하시니.
좁은 소견에 어찌나 서운하던지...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자
얼굴도 좀 두꺼워지고 능청스러워져서 시아버님 까탈스런우신 성깔도
별 무리없이 능구렁이처럼 받아 치는 여유도 생겼다.
이젠 내 나이도
시어머님께서 날 며느리로 맞으시던 그 연세보다 훨씬 더 많아졌으니
'명절증후군' 따윌 논할 때는 지나버린 것 같아 그마저 서운하다.
남자들이 많은 집이라서 행사 때마다 여자들은 주방에서 고생하고
남자들은 거실에서 차려 준 상만 받아 먹는 것에 대해서 난 늘 불만을 토로했었다.
'이게 뭐냐? 여자들이 무슨 시녀냐?
왜 부엌에서 밥을 먹느냐, 며느리들 상도 근사하게 따로 차려서 먹도록 해야 한다...'
그 사이 시댁 풍속도도 많은 변화가 일었다.
행사 때면 주방 일을 일찍 끈 낸 후에
날나리 맏며느리의 제안으로 모두들 노래방으로 간다던지 드라이브를 하고 온다던지
우아한 찻집엘 간다던지...등등의 '며느리만의 단란한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어찌 인간은 그다지도 어리석은 동물인지
세월 지나고 나니 별 것도 아닌것을 행사 때마다 골치가 아팠던 지난 날들이
이젠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세상사 모두 내 마음 먹기 나름인 것을...
'역시 장남 며느리는 타고 난 모양이다...',
'너 같은 마누라가 대한민국에 어디 있다냐...'라시며
늘 '네가 옳다'라고만 하시는 시어머님이 오늘 따라 몹씨도 그립다.
이젠 달랑 두 분만 생존해 계시는 '부모님'이신데 언제나 효도를 제대로 하게 될런지...
올해에도 제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마음 속 깊이 기원해 본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만수무강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