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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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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BY baada 2003-12-19

칼날같은 바람이 머풀러를 더 꼭꼭 여미도록 만들던 그런 저녁에 딸아이와 중앙통에 나갔다.

오랜 시험기간에서 해방된 아이는 나사 조금 풀린 아이처럼 재잘재잘 신이 났다. 추운데도 막무가내 저녁외출에 동행하는 아이를 몇 번이고 나무랐지만 금새 난 아이의 조잘거림에 추위를 잊고 요놈 데리고 나온 걸 참 잘했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혼자 어둑한 거리를 잰걸음으로 돌아나올려면 꽤나 혼자 종종대며 더구나 시린바람에 몸이 잔뜩 굳어버렸으리라 쉬이 짐작이 갔다. 어쨌든 아이와 함게 동행하길 잘했다 싶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도심은 요란한 빛으로 한껏 추위를 물리치고 있었다. 젊은 그니들. 삼삼오오.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사람들로 꽉 찬 중앙로 한 복판으로 딸랑딸랑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그 가생이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딸아이에게 지폐 한 장을 쥐어 보냈다. 아이는 난생처음 구세군의 남비속에 돈을 넣으며 신나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여태 자라온 아이에게 이 밤의 휘황찬란한 불빛의 난무와 인파들 그리고 티브를 통해서만 보아 온 구세군의 모습이 그저 즐거웠으리라.

 겨울 저녁은 이렇게 아이에게 한장의 인상화처럼 화첩의 한페이지가 되어 남겠지. 아이가 지나가게 될 무수한 크리스마스와 겨울 밤 그리고 사람사람들. 시나브로 아이는 나이가 들어 가겠지.  

 11층 빌딩에서 내려다 본 대구의 야경은 불빛이 만들어 놓은 강이었다. 어둠과 빛이 넉넉하게 어울어진 길을 따라 끝없이 꼬리를 물고 나아가는 도시의 밤은  사람들을 모두 삼켜버린뒤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이었다. 아웅다웅 살을 부비며 살아가는 인정이 있길래 도시는 그 맥을 이어나가겠지만 그러나 아득한 이 빌딩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사람의 냄새를 전혀 맡을 수가 없다. 아이는 한참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곳이 대구의 중앙통이란다. 그렇게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나는 뜻없이 말하였다.

 늘 조금은 미안해 하면서 살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는 미안해했다. 아이에게 미안했고 남편에게 미안했고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누군가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그 미안함은 드러난 미안함이 아니라 빛이 소리없이 세상을 밝히듯이 어둠이 기척없이 내 등덜미에 몸을 기대듯이 아주 살금살금 지나가고 다가왔다. 미안하다는 건 어쩌면 살아있음의 또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그건 조금은 당당할 수 있다는 자만인지도 모른다. 생의 여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난 미안해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많은 말을 뱉아내면서 미안하다라고 쏟아내면서도 정작 미안해 하지 않았고, 사람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는 커녕 심술과 비아냥과 끝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미안함은 전혀 내 몫이 아닌것이다. 그러나 난 슬펐다. 미안함을 상실당한 내 모습에 질린 가장 미안한 내 삶. 아이의 손에 들린 천원짜리 지폐처럼 후줄근한 내 모습을  정작 아이가 잊어주길 바랬다. 

 겨울바람은 꽃처럼 피어난 빛을 흩어 놓았다.

 아이와 난 나란히 길을 걸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흔들리며 돌아갔다.

 허물어질듯 지탱하고 있는 그러나 너무나 견고하여 아무도 흐트릴 수 없는 생 속으로 우리는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