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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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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 끓이는 남자


BY 이쁜꽃향 2003-11-18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려 돌아 누우려는데 남편이 날 흔들어 깨운다.

속 괜찮니?

도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누구랑 마셨니?

술 마신 뒤엔 된장국이 최고야, 끓여줄테니 꼭 먹고 가...

남편은 서둘러 주방으로 향한다.

 

맞아...

어젯밤 난 술을 좀 과하게 마셨지...

동사무소 후배 복지사가 모임 회원들 단체 등산복 좀 고르러 가자고 해서 만났었지.

저녁 먹자는 걸 난 다이어트 중이니

술도 마실 수 있고 저녁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지...

언니~

그 술 마신단 얘기 좀 하지 마라, 술도 못 마시는 분이...

후배는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래서 찾아간 음식점이 우리 집 앞 보쌈집이었다.

그 집에선 수제비도 주고 된장국도 나온다.

소주를 시켜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

후배는 주량이 좀 센 편이지만 난 고작해야 한 두잔 정도,

그것도 그 날 컨디션에 따라 아예 전혀 못 마실 때도 있다.

어제는 술이 비교적 마시기가 수월했다.

고만 마시라는 후배의 걱정에 '괜찮아'를 연발하며 호기를 부려 계속 마셨다.

나 인제 오빠한테 혼 나게 생겼네...언니 이렇게 술 먹였다고...

 

아우~~

기분 베리 나이수다~

온 세상이 모두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릿 속은 빙빙 돈다.

아니 온통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이 기분이면 뭔 짓인들 못하랴 싶다.

이래서 주당들이 그렇게 술을 즐겨 마시는 건가보다.

후배는 나를 부축하여 잠시  술 좀 깨라고 카페로 데리고 갔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고 눈을 뜰 수가 없다.

차가운 매실차 한 잔인가를 마시고 나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거 같아

후배에게 의지하여 밖으로 나왔다.

언니야...그냥 토해 버려.

그러면 속이 좀 편해져...

난생 처음 별 더러운 짓을 다 해 보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 속 묵은 찌꺼기까지 모두 토해버렸으면 좋으련만...

후배가 집까지 바래다 주고 난 후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속이 조금은 편해진 듯 한데 머리는 여전히 아프고 천정이 빙글빙글 돈다.

누군가를 불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 당신 어디야??

깜짝 놀란 듯 남편의 외마디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말할 기운이 없어 입안에서만 맴 도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집이야...집... 빨리...와...

급한 목소리로 아들넘에게 운전을 재촉하는 남편 목소리를 끝으로 난 풀썩 쓰러져버렸다.

 

아니...

당신 술 마셨어?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토했니?

급하게 물을 데워 와서 억지로 한 모금씩 마시게 하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안 마시겠다 마셔야 한다 옥신각신 한 시간 이상을 실랑이를 한 거 같다.

남편도 나도 지쳐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던가 보다.

 

된장국에 밥을 말아 와서는 억지로 한숟갈씩 떠 먹이려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 본다.

먹어 봐.

먹어야 해

그래야 오전 내내 속이 편해.

안 먹으면 고생한다니깐...

싫다는 걸 자꾸만 권하니 마지못해 몇 숟갈 받아 먹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 온 뒷날 미워서 밥도 안 차려 주었던 지난 날들이 생각나서...

그 때마다 그는 얼마나 속이 쓰렸었을까...

겪어봤으니까 이렇게 해장국을 먹이려 하겠지...

이제 보니 남편이 없으면 술 마시고 나서도 불편하니깐 안되겠네...

 

겨우 추스리고 일어서려는데 그도 따라서 일어선다.

앞으론 절대 술 마시지마...

포옹하는 그를 슬며시 밀어내고 나오면서 쓸 데 없는 생각을 한 번 해 본다. 

완전히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면 어떻게 될까...

꼭 한 번만 그렇게 마셔보고 싶다...

내 자신을 완전히 망각할 때까지 그럴 때까지 마셔보고 싶다...